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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군 신륵사 대장각기

여흥군 신륵사 대장각기1)

판삼사사(判三司事) 한산(韓山) 목은(牧隱)선생이 이숭인(李崇仁)에게 이르기를, “대덕경무(大德庚戊, 1310)년 7월 초 3일에 나의 조부 정읍부군(井邑府君)이 병으로 돌아가셨다. 선군(先君) 가정(稼亭) 문효공(文孝公)이 나이 13세였으나 초종 장례에 유감이 없었다. 지정경인(至正庚寅, 1350)년 10월 2일에 조모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선군이 예를 다하여 장사를 마치고 중을 청하여 시골 절에서 불경을 읽었다. 선군이 항상 탄식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의지하고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하였다. 좌올남산총공(坐兀南山聰公)이 선군에게 말하기를 “공이 진실로 우리 불법으로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면 어찌 장교(藏敎)의 일부를 간행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불법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선군이 즉시 부처의 초상을 향하여 기원(祈願)을 세웠다. 다음해인 신묘(辛卯, 1351)년 정월 초 1일 선군이 불행하게도 어머님의 상복을 입으신 중에 돌아가셨다. 내가 중국에서 분상(奔喪)하여 와서 총공을 청하였다가 불경을 읽었다. 말이 선군의 입원(立願)에 미쳤으나 내가 이미 상중에 있음으로 겨를이 없었다. 이미 면상(免喪)한 뒤에는 요행히 세과(世科)2)에 들어 이름이 관원명단에 실리게 되었음으로 오직 직무에 충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겨를이 없었다. 총공이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선대인(先大人)3)의 입원(立願)을 어찌 어길 수 있습니까” 하였으나 일찍이 답장은 하지 않고 스스로 상심할 뿐이었다. 홍무신해(洪武辛亥, 1371)년 9월 26일에 선비김씨(先妣金氏)4)가 또 병으로 돌아가셨다. 상기가 겨우 끝났을 때는 내가 병이 나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갑인(甲寅, 1374)년 9월 23일에 현릉(玄陵)5)이 문득 모든 신하들을 버리고 승하하였다. 내가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니 현릉이 잠저(潛邸)6)에 있을 때부터의 옛 신하로서 오랜 세월을 섬겼으며 나는 현릉 초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드디어 재상관부에 올랐으니 우리 부자가 입은 은택은 지극히 우악(優渥)하지만 일찍이 털끝만한 보답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궁검(弓劍)을 버리셨으니 어찌 슬픔을 이길 수 있겠는가? 기미(己未, 1379)년에 총공이 마침 산중에서 내려와 나에게 말하기를, “이제 나의 나이가 벌써74세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죽지 않고 공과 더불어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선대인의 말씀이 뚜렷이 귀에 남아 있습니다. 공은 기억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더욱 스스로 마음 아파 말하기를, “위로는 선왕의 명복을 빌고 아래로는 선고의 뜻을 계승하는 일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라 하였다. 내 병이 회복되었을 때 왕명을 받들어 나옹의 탑명을 지은 것이 오래되지 않았다. 스스로 계획하여 보니 내 힘으로는 부족하다. 힘입어서 이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옹(懶翁)의 무리들뿐이다. 즉시 편지를 보내어 의사를 말하였다. 호를 무급(無及)이라 하고 수봉(琇峯)이라고 하는 두 중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격려하였다.

경신(庚申, 1380)년 2월부터 인연을 따라 찬조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각절(覺岊)은 순흥(順興)지방에서 각잠(覺岑)은 안동지방에서 각홍(覺洪)은 영해(寧海)7)지방에서, 도혜(道惠)는 청주지방에서, 각연(覺連)은 충주지방에서, 각운(覺雲)은 평양지방에서, 범웅(梵雄)은 봉주(鳳州)8)지방에서, 지보(志寶)는 아주(牙州)9)지방에서 권선하였다.10) 닥나무가 변하여 종이가 되고 검은 것은 녹여 먹을 만들었다.

신유(辛酉, 1381)년 4월에 이르러 경율론(經律論)을 인쇄하여 9월에 표지를 꾸미고 10월에 각주가 니금(泥金)11)으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이 표지를 만들었으며 11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들었다. 아침, 저녁으로 몇 되 몇 말의 곡식을 빌어다가 여러 중들의 밥 먹이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은 자가 국신리(國贐里)에 사는 노파 묘안(妙安)이었다

임술(壬戌,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영통사(靈通寺)에서 거듭 교열하고 4월에 배에 싣고 여흥군 신륵사에 이르니 나옹이 입적한 곳이다. 화산군(花山君) 권공(權公) 희(僖)가 제목을 주관하여 다시 여러 시주들과 더불어 시재(施財)하고 동암(同庵) 순공(順公)이 사를 감독하여 드디어 절 남쪽에 2층집을 짓고 크게 단청 장식하였다. 준공함에 그 안에 넣어 간직하였다. 5월에 전경(轉經)하고 9월에 전경하였으며 금년 들어 계해(癸亥, 1383)년 정월에 또 전경하였다. 대략 1년에 세 번 항규(恒規)로 한다. 가운데 동산을 만들고 사람의 키만큼 큰 비로자나의 불쌍한 위(位)를 두었다. 당성군(唐城君) 홍공(洪公) 의룡(義龍)이 죽을 딸을 위하여 지은 보현보살상 한 위, 강부인(姜夫人) 화연(化緣))이 지은 문수보살상 한 위가 있어서 사중(四衆)의 무리들에게 우러러 보고 예배하는 존경심을 일으키게 한다. 30여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들의 입원이 비로소 이루어 진 것이다. 어찌 스스로 경축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 큰 공을 이루어 영원히 임금의 장수와 나라의 복을 비는데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중들이 비석을 세워 장래에 가르침을 보이려 한다.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대장각기를 써라 하였다. 숭인(崇仁)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곧 말하기를 부처의 도가 청정하고 고요하여 한 점의 티끌도 묻지 아니하고 만물에 초연하게 뛰어났음으로 현자와 지자들은 본래부터 이를 즐겨한다. 그 말에는 또 소위 복전(福田)이익이라는 설이 있다. 여기에서 충신효자로서 임금이나 어버이의 은혜를 갚으려는 자라면 그 극진한 방법을 쓰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 귀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불서가 세상에 크게 전파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정(稼亭)선생이 이미 일을 일으키고 목은(牧隱)선생이 계승하여 마침내 능히 이 법보를 이룩하여 임금과 어버이에게 복을 받드는 이것이 곧 충신, 효자가 극진한 방법을 쓰지 않음이 없다는 것일까? 누가 신하 아니며 아들이 아니겠는가?

지금부터 천만 세에 이르기까지 그 하늘같이 존경하는 자(임금이나 부모)에 대하여 감모하고 발원하는 바가 있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서 그 기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아니하니 숭인이 감히 즐겨 글을 쓰지 아니하랴. 저 사중의 무리로서 재물을 바쳐 조력한 자는 그의 성명을 모두 비 뒷면에 적어둔다.

驪興郡神勒寺大藏閣記

判三司事韓山牧隱先生 命崇仁曰 大德庚戊七月初三日 吾祖井邑府君病歿 先君稼亭文孝公 年十三喪葬無憾 至正庚寅十月二十日 祖母病沒 先君襄事以禮 間請浮屠 轉絰于鄕之僧舍 先君每歎 吾今而後何怙何恃 座元南山聰公謂先君曰 公今苟欲以吾法 資考妣冥福盍成一部藏敎乎 吾法盡在是矣 先君卽向 金仙肖像 而立願焉 明年辛卯春正月朔 先君不幸歿於襄經之中 余自燕奔喪 仍請聰公轉絰 俉及先君之願 予方讀禮暇及也 旣免喪 僥倖世科名載仕版 惟不克供職之畏懼 又未暇及也 聰公屢以書來曰 先大人之願 其可違乎 則未嘗不對書 自傷而已 洪武辛亥秋九月二十六日 先妣金氏又病沒 憂制甫終 吾疾作莫能興 甲寅秋九月二十三日 玄陵奄棄群臣 予竊伏念 先君爲 玄陵潛邸 舊臣積有年紀 予爲 玄陵初科及第 遂陞宰府 吾父子蒙恩 至渥曾未有絲毫之報 而弓劍忽遺 可勝痛哉 歲己未 聰公適自山中來語余曰 今茲吾年七十又四矣 而幸不死 得與公相見 豈偶然哉 先大人之言 在耳 公能記憶否乎 予益自傷心曰 上以資福於 先王 下以繼志於先考 不在斯歟 不在斯歟 予病新起 奉敎撰懶翁塔銘未久也 因自計吾力則不足矣 可賴以辦此者 惟懶翁徒耳 卽馳書告之 有號無及琇峯二浮屠者 率其徒縱史 始自庚申二月募緣 覺旵於順興 覺岑於安東 覺洪於寧海 道惠於淸州 覺連於忠州 覺雲於平壤 梵雄於鳳州 志寶於牙州 化楮爲紙 釋幻造墨 至辛酉四月 卽出經律論 九月粧楷 十月覺珠泥金題目 覺峯造黃複 十一月性空造函 朝暮升斗 以飯諸化士 終始不怠者 國贐里之老嫗妙安也 壬戌正月於華嚴靈通寺轉閱 四月舟載至于驪興之神勒寺 懶翁示寂之地也 花山君權公僖 主盟題目 復與諸檀施財 同庵順公董役 遂於寺之南起閣二層覺䂦丹雘 旣畢庋而藏之 五月又轉 今癸亥正月又轉 約歲三次爲恒規 中置花山 等身毘盧遮那一軀 唐城君洪公義龍 爲亡女所造普賢一軀 姜夫人化緣所造文殊一軀 以起四衆瞻禮之敬焉 鳴呼 三十餘年之久 而先君之願始成 豈不自慶 又况推其極功壽君福國於無窮也哉 諸浮屠謀立石垂示將來 子其代予筆 崇仁不敢辭 乃言曰 佛氏之道 淸淨高妙 不霑一塵 起出萬物 賢智者 固已樂之矣 其言又有所謂福田利益者 於是忠臣孝子 所以報君親之至恩 無所不用其極者 不得不歸焉 其書之盛傳於世宜也 稼亭先生旣作之 牧隱先生又述之 卒能成此法寶 奉福利於君親 斯乃忠臣孝子之無所不用其極者哉 鳴呼 孰非臣子哉 自今至于千萬世 其有所感發於所天者 必於此 而得之也 無疑矣 崇仁敢不樂爲之書 若夫四衆之出財力以門助者 其名氏 具列於碑之陰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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