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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일제강점기

광주분원이 폐요되고 도공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1883년 관요가 민간으로 이양되었다. 분원이 민영화된 것은 상업자본에 의한 자연적인 현상이 그 원인이나. 새로운 기술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당시로서는 장인들에게 생활의 부자유와 불안정을 가져왔다. 한편 수공기술의 전통복원을 위해 고심했던 구왕실과 일본인의 제작요구가 맞물려 전통도자의 재현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한국적 미감과 창조성을 상실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일제강점 후 약 10여 년은 총독부의 제한된 경제정책으로 도자 원료조사와 같은 기초조사 사업만이 추진되었으며, 1920년대 도자업은 일본인들의 자본과 기술을 적극 도입하면서 생산이 증가하였다. 전국적으로 요업공장을 증설하고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제조하였다. 크고 작은 제작장이 1912년 101개에서 1928년 974개로 10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1928년을 기점으로 소규모 지방요들이 집중 폐업하여 전체 요업 공장수는 1/4 이상 줄었다. 또 1930년대 중반부터 해방까지의 국내 도자업은 점진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결국 일제지배 아래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던 우리의 우수한 도자문화 역시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무참히 말살되었다. 특히 이 시대는 도자사에서 가장 큰 폐단으로 지적되는 한국 전통미감의 상실은 현재까지도 완전하게 되찾지 못한 커다란 상처로 남아 있다.1)

일제강점기 여주지역 도자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1892년 분원리에서 이주한 이희풍이 등요 1기를 축조하였다. 1907년 김현채, 조원식이 등요 3기를 증축하여 비로소 완전한 도자기 마을로 변모하였다. 조원식이 운영하는 요는 1917년 도미타가 인수하였다.2) 도미타는 이창배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운영권을 맡기며 신고려자기를 제조시켰다. 그러나 이창배가 제품을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자 도미타는 요와 제조장 그리고 이 일대의 토지를 310원에 다시 인수하였다. 이후 1925년경 제작장은 함녕섭이 임대 운영하였다. 함녕섭은 1년에 임대료 60원을 지불하였다. 이와 같이 도자기 공장이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917년부터이며, 그후 기계화된 대규모 공장인 조선도기가 가동되면서 도자업이 활기를 띤 오금리는 원료를 산출하고 공장을 설치하여 자기제조를 실행하여 상당한 제품을 생산하였다.

현재 요지라고 생각되는 곳은 두 곳으로 그중 하나는 여주시 오학동 539번지로 1910년대의 도요지라고 전하나, 현재 공장부지나 경작지로 아직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다.3) 다른 한 곳은 여주시 가남읍 대신 2리에 요지가 있었다고 하나 이곳 또한 확인할 수 없다.

1920년경부터 여주시 현암동, 오학동 일대는 생활자기와 전기부품을 주생산품으로 기계화된 도자기생산 지구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제조법이 재래의 방법과 경험에 의존한 것으로 더 이상 발전하지는 못하였으며 원료, 제조법, 설비의 개선이 필요하였다. 경기도는 이러한 문제점을 인정하여 1927, 1928년에 도지방비를 보조하여 요의 개량, 기계구입 등 일부 개선을 도모해 조선그릇인 조선식기를 제조하였다.

1931년~1945년엔 일제의 중앙시험소 요업과에서 여주 일대를 조사, 질 좋은 도자원료의 매장사실을 확인하고 이 원료를 이용하려는 목적에 1931년 4,000원의 국고보조금으로 오금리에 여주도자기제조 공동작업장 설치를 계획하였다.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에 의뢰하여 등요1기와 제토, 성형, 갑발, 제조형에 필요한 기계용구를 설비할 공장을 완성하여 조선식기 제조에 착수하였다. 1932년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요업과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이 시험소의 직원으로 기술과장 이임준, 서무과장 한호석, 그 외 지순택, 조각사로 유근형이 근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여주의 조선도자기주식회사가 1936년 12월경 조선인과 일본인이 50만 원을 합자하여 여주군 북내면 오학리(현재 여주시 오학동)에 설립되었다. 이 회사가 여주에 설립된 것은 이 일대의 우수한 도자원료 산출과 관련이 있다. 조선도자기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 전국 3대 도자기공장 중 하나로 그 공장을 모체로 도공들이 분가해 여러 요장들이 생기게 되었다.

해방 전후 한양요업, 삼성요업 등 도자기공장이 새로 건립되었고 주생산품은 식기류와 생활자기였다.

일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여주지역에 대대적인 도자원료 굴취작업을 하였다. 이로 인해 우수광산의 토맥이 상실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1940년대는 민간 제작장에서 저급한 태토를 구입하는 것조차 힘들었으며, 이로 인해 대부분의 제작장은 생산이 중지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민간 제조장의 현황을 보면 1920년경 요강과 막사발을 만드는 요장이 오학동에 4개소, 오금동에 2개소, 북내면 당우리에 1개소, 외룡리 1개소가 있었다. 옹기가마도 여주시 현암동, 오학동, 강천면 적금리에 있었다. 이때부터 조선조 본래의 백자 느낌인 질박하고 은은한 정감의 백자는 사라지고 조선백자의 맥은 끊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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