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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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개요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 1690~?)은 그의 저서인 『택리지(擇里志)』복거총론(卜居總論)의 산수편(山水扁)에서 강촌에 대하여 논하기를,

“무릇 강마을은 농사 짓는 이로움을 겸한 곳이 드물다. 마을이 양쪽 산 사이에 있고, 앞에 강물이 막혀 있으며, 땅이 모래와 자갈이어서 경작할 만한 밭이 없으며 비록 있더라도 멀어서 갈고 거두기가 어렵다. 혹 지세가 낮아 물에 잠기어 수확이 없게 되며,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메마른 땅이다. 물이 너무 깊고 크면 관개(灌漑)할 수도 없고 가뭄과 큰 물이 쉽게 드는 까닭에 강가에 사는 것은 한낱 강과 산의 경치만 있을 뿐이고 의식을 얻는 이로움이 적다.”

고 정의를 내리면서, 국 중 제일의 강촌은 평양(平壤)의 외성(外城)이요, 다음은 춘천(春川)의 우두촌이요, 다음은 여주읍(驪州邑)이라고 선별한 후 자세하게 그 사실적 이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특히 여주읍의 경우는 “한강 상류 남쪽 언덕에 있다. 강언덕의 남쪽으로는 들판이 직통으로 40여 리나 된다. 그러므로 기상이 맑고 멀다. 강이 웅장하거나 급하지 아니하고 동쪽에서 서북쪽으로 흘러가는데, 위편에 마암(馬巖)과 벽절(甓寺 : 지금의 신륵사)의 바위가 있어서 수세를 완만하게 한다. 또 서북쪽이 평이한 까닭에 읍으로 다스려진 지가 수천 년이 된다.”고 하면서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대개 평야지대에는 관상할 만한 산수가 없어 기록에 남을 만한 시문(詩文)이 없었고 반대로 산수가 뛰어난 곳은 시문은 많으나 전답(田畓)이 부족하여 생산이 없어서 가난을 면키 어려웠다. 여주는 농경사회 때부터 먹고 살기에 넉넉하면서 산수경개가 또한 아름다우니 남겨진 시문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로 여주의 문예활동은 거의 이 나라 역사의 중심축을 이룬 명사(名士)들이 남긴 수많은 시문으로 대변되었고. 평민들의 문예활동은 구전(口傳) 설화(說話)나 민속놀이로 전승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여주에 우거(寓居)하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나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여주 문예활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에 와서 문예의 고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거를 확실하게 마련해준 문예인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여주의 문예인들이 받들어야 하는 시조(始祖)격인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의 업적을 기념하는 백일장 하나 갖추지 못하는 현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수많은 시인 묵객(墨客)이 여강의 청심루(淸心樓)나 신륵사에서 절창(絶唱)을 남겼다. 신륵사는 증·개축을 거듭하면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건재하고 있으나, 신륵사보다 더 많은 칭송을 받았던 청심루는 화재로 소실된 후 오늘날까지 복원하지 못한 형편이다.

해방 이후 소설가 묵사(默史) 류주현(柳周鉉, 1921~1982)이나 화가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같은 분이 국중의 명가로 활동했으나 그 무대가 주로 중앙에 치중되어, 류주현은 여주에 그 흔적이 거의 없다. 장우성은 이천시 백사면의 현암공원과 출생지인 흥천면 외사리에 그림이 아닌 비석 글씨로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1960~70년대 시골에는 눈만 뜨면 일하고 먹고 나면 일하는, 소위 가난 탈출을 위한 ‘잘살아보세’ 구호만이 세상에 진동했다. 이런 와중에 문예의 혜택은 서울에서 개봉된 지 한참 지난 영화를 상영해주는 노천의 가설극장과 약장수들의 어설픈 신파극, 추석 무렵 마을마다 자생적으로 열렸던 ‘가요 콩쿠르’라는 무대에서 행해지던 처녀 총각들의 노래자랑, 마을에 몇 대밖에 없는 라디오에서 간혹 들을 수 있었던 유행가를 입에서 입으로 옮겨가며 배우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우리가 보았거나 몸소 체험했던 전승놀이로는 설날에 마을어른께 세배하기, 대보름에 달집 태우기, 밥 훔쳐 먹기, 망우려 놀이, 단오에 그네 뛰기, 백중에 씨름대회와 농악놀이, 추석에 거북놀이, 추수 후에 고사 지내기, 동지에 팥죽먹기 등이었다. 또 집을 지을 때 지경 다지기, 상량식, 새우받기 할 때 마을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며 일하던 노동과 놀이가 혼합된 것도 있었다. 그리고 장례와 혼례의 모든 절차는 의례와 놀이가 혼합된 것으로 각각의 행위가 예술 그 자체였다. 한편 강촌에서 특히 많이 벌어졌던 굿판은 행위예술의 정수였다.

새마을운동은 오로지 잘 먹고 잘살자는 구호 아래 지붕 개량과 신작로 건설 등을 보여주는 데에만 급급한 획일주의적 추진 운동이었다. 그래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며 행해지던 우리들 향촌의 놀이문화는 편리하지 못하고, 지루하고, 미신의 요소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부분 내몰려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경기도나 국가 단위의 민속경연대회에서 허울 좋게 경연이라는 이름 아래 공연되고 있으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현재 여주에서 문예활동을 관장하는 기구로는 여주문화원, 한국예총 여주지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여주지부 등이 있고 그 회원수는 300여 명에 이른다. 그리고 관내 거리의 곳곳에는 ‘문화관광의 고장’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으며, 해마다 ‘도자기축제’를 열어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관계 공무원과 단체에서는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특히 ‘쌍용거 줄다리기’와 ‘해촌 낙화놀이’에는 꾸준히 예산을 지원하여 해마다 시연(試演)을 펼치고 있으며 그 전승과 보존을 위해서 여러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또한 예총의 시화전, 사진, 그림 전시와 더불어 민예총의 대보름 한마당, 문화의 거리 행사 등에도 인적·물적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같은 노력으로 인해서 외부에서는 여주가 그럴 듯하여 모두 문화예술의 고장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구조가 취약하고 관의 지원과 외부 기획사의 기획과 연출에 의지하는 행사와 사업이 수두룩하여 마치 ‘사상누각(沙上樓閣)’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역의 문화예술 행사와 사업이 성공하려면 대략 다음의 몇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만 가능하다. 첫째는 문예사업과 행사에 대한 전문지식과 많은 실무경험을 겸비한 인력의 확보가 필요하다. 둘째는 적절히 지원하고 확실히 관리감독하는 예산지원의 효율화이다. 셋째는 전시, 공연, 강습을 효율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시설의 구비이다. 넷째는 문예 기능인의 보호 및 육성책이 절실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전체 군민의 문예활동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호응이다. 이상과 같은 항목에 대하여 현재의 실정을 기술해보고, 그 대안을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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