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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천도교(天道敎)는 조선 후기 1860년(철종 11)에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를 교조로 하는 동학(東學)을 1905년(고종 9) 제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가 천도교로 개칭한 종교이다.

최제우는 전통적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나, 당시 시대를 걱정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는 국내적으로는 외척(外戚)의 세도정치와 양반, 토호들이 일반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자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민란이 각지에서 발생하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무력침략의 위기를 맞던 시대였다.

최제우는 21세에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도(道)를 얻고자 주류팔로(周流八路)의 길에 나서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 양산 천성산 암굴에서 수도하고 도를 갈구하여 1860년 4월 5일 ‘한울님(하느님)’으로부터 인류 구제의 도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도의 이름을 ‘무극대도’라고만 하였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하여 많은 교도들이 모이자, 관(官)과 유생들이 혹세무민한다는 구실로 탄압하여 부득이 전남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최제우는 1862년 1월경에 지은 『논학문(論學文 : 東學論)』에서 처음으로 무극대도는 천도(天道)이며 그 학(學)은 서학(西學)이 아닌 동학(東學)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리스도교적 영향과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핵심으로 한 ‘사람이 하늘이다(人乃天)’는 교리를 완성하면서 동학이 성립하게 된다.

이 해에 다시 경주의 박대여(朴大汝) 집에 머물면서 포교할 때, 충청, 전라 지방에서까지 수천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자 교도들을 조직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1862년 12월 동학의 신앙공동체인 접(接)제도를 설치하고 접주(接主) 16명을 임명하였다. 최제우는 1863년 3월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포교활동에 나섰다. 접주들로 하여금 교도들을 수십 명씩 동원하여 용담정에 와서 강도(講道)를 받게 하는가 하면, 동학 교단 책임을 맡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최경상(崔慶翔 : 時亨)을 선임함으로써, 그는 북접(北接) 대도주가 된다.

최제우는 관의 탄압을 예견하고 같은 해인 1863년 8월 14일에는 도통(道統)을 최경상(崔慶翔)에게 완전히 물려주었다. 날이 갈수록 동학 교세가 커지자, 놀란 조정은 그해 12월 10일에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를 파견,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3월 10일 대구에서 형을 집행하여 최제우는 41세를 일기로 순도하였다.

최경상이 바로 동학 2세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다. 경상은 처음의 이름이었고, 고향은 경북 경주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한때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하기도 했다.

최시형은 1861년(철종 12) 동학에 입문, 1863년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된다. 1864년(고종 1)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山)에 은신하여,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과 울진(蔚珍) 등지에서 포교에 힘썼다. 1871년(고종 8) 허락도 없이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하여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탄압이 강화되자 소백산(小白山)에 피신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주요 경전(經典)을 발간하여 교의(敎義)를 체계화하고,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탄압이 완화되자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조직을 강화했다. 18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교조의 신원,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관찰사에게 요구했다.

18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으고 그 소두(疏頭)로서 박광호(朴光浩)를 내세워 왕에게 직접 상소,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의 선처를 약속받고 해산했으나 시행되지 않자, 다시 보은(報恩)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을 시켜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 우선 경상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북접(北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전봉준이 일본군 상륙과 정부의 요구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재기포(再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했다. 관군과 일본군 혼성군과의 공주(公州)싸움에서 참패하고 장수(長水) 등지에서 연패하여 피신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최시형과 그의 무리들은 피신을 다니게 되는데, 이 때 주요거점이 여주를 비롯한 근처지역이었다. 충북 충주 외서면에서 부대를 해산한 이후, 부론면 노림리와 홍천을 거쳐 인제의 오지로 들어가 1년 동안 숨어살다가, 이듬해 1895년 12월 치악산 수레너미(횡성군 안흥면 강림리 거유동)로 넘어왔으나 3개월 후 충북 음성 근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다시 음성에서 상주, 이천 등으로 떠돌아다니다가 현재의 이천과 깊은 관련을 맺게 된다. 원주의 전거론으로 피신한 그는 동학 교리의 핵심인 ‘하늘로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는 원리와 ‘하늘은 사람이고, 사람은 하늘이다(天是人 人是天)’는 교리를 강론하게 된다. 바로 이곳이 지금의 강천면 도전2리이다.

이후 최시형은 관군의 추적을 피해 홍천 등으로 피신을 다니다가 1898년 4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가마로 문막까지 이송되고, 여주에서 배편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마침내 6월 2일 72세의 나이로 순도하였다. 세월이 흘러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된다.

그런데 바로 최시형의 묘소가 금사면 주록리 산 96-16번지에 있다. 1897년 최시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강천면 도전리에 피신해 있었던 것과 관련성이 깊다. 처형 후 광화문 밖에 가매장된 시신을 며칠 뒤인 6월 5일 이종훈(李鐘勳) 등이 수습하여 야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묘소는 1986년에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는데, 봉분은 원형으로 호석을 둘렀으며, 봉분 앞 중앙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상석, 향로석, 촛대석을 마련했고, 우측에는 옥개석과 장방형 비좌를 갖춘 대리석 묘비가 서 있다. 묘비는 1980년 3월 21일 천도교 해월신사 묘비건립위원회에서 세웠다. 여주에는 일찍이 1906년 1월 4일 천도교 여주교구가 설립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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