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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전래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594년(선조 27) 포르투갈 신부인 세스페데스(Sespedes)라고 기록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종군신부로 입국한 그는 이후 많은 선교활동을 하였고, 북경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면서 천주교 서적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천주교 역사는 자생성을 매우 강하게 보여주고 있어, 누구에 의해 전래되었다기보다는 학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탐구되었다고 평가된다. 이벽(李蘗), 권철신(權哲身), 정약종(丁若種), 이승훈(李承薰) 등과 같은 인사들이 천주교 전적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맛보았으며, 이를 친지와 후학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조선에서는 세계천주교 역사상 유래 없는 ‘신부 없는 전례’가 이루어졌다.

시련도 많았다. 1801년(순조 1)의 신유교난(辛酉敎難), 1839년(헌종 5)의 을해교난(乙亥敎難), 1864년(고종 1)의 병오교난(丙午敎難), 1866년(고종 3)의 병인교난(丙寅敎難) 등의 박해 속에서 천주교는 점차 성장해 나갔다. 이와 같은 역사 때문에 우리나라의 전역에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성지(聖地)가 곳곳에 있으며, 그 결과 1831년(순조 31) 9월 9일 독립된 교구로 인정된다. 1836년(헌종 2)에는 프랑스 신부 모방(Maubant)이 입국하고, 1837년(헌종 3)에는 앙베르(Imbert) 주교가 샤스땅(Chastan) 신부의 후임으로 입국한다. 당시의 신도는 9천 명이 넘었다. 1839년(헌종 5) 조정의 탄압은 계속되어 을해사옥(乙亥邪獄)이 벌어져 3명의 선교사와 많은 신도가 죽음을 당한다. 그럼에도 신앙의 전파는 계속되어 1845년(헌종 11)에는 김대건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어 귀국하여 전도하였으나 사형에 처해진다.

한편, 외국인 신부를 사형에 처하는 등의 강력한 조정의 조치는 자국의 신부를 보낸 국가의 분노를 사게 된다. 천주교 북경교구 등에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프랑스에서는 1846년(헌종 12) 해군소장인 세실(Cecile)로 하여금 군함 3척을 이끌고 방한토록 한다. 이때 선교사 박해의 책임을 왕에게 묻고자 했던 것이다. 다음해 회답을 듣기 위해 다시 군함을 파견하지만, 1척이 좌초하여 영국함정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철종대(哲宗代)에 들어서는 상황이 달라지기도 한다. 민란이 각지에서 벌어지자 정부는 천주교 탄압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때 메스뜨르(Maistre), 베르누(Berneuk), 페롱(Feron) 등이 입국하는 등, 외국인 선교사가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어 교세가 확장된다. 당시에는 1만 2천여 명의 신도가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러시아와의 긴장관계 속에서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을 얻고자 했으나 잘 되지 않자 여러 대신들과 더불어 천주교를 강력히 배척하게 된다. 1866년(고종 3)부터 천주교 탄압령이 공포되고, 김장운(金長運), 남종삼(南種三), 정의배(丁義培) 등과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처형된다.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벌어지고 충남 예산의 남연군(南延君) 묘가 도굴되면서 이러한 박해는 더욱 심해져서, 1873년(고종 9)까지 4백여 명이 처형된다. 그러나 대원군 실각과 더불어 척화비(斥和碑)는 무용지물이 되고, 1882년(고종 19)에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함으로써 천주교 활동이 자유를 얻게 된다.

1887년(고종 24) 9월 31일 블랑 주교가 『조선교회 지도서(Coutumier de la Mission de Core)』를 반포하였다. 실로 오래된 박해의 결과였다. 1857년(철종 8) 3월 15일 베르뇌 주교가 안 안또니오 신부를 보좌주교로 서품한 후 한국교회 최초로 주교회의를 개최한 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갖은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발전하여, 1945년 해방된 해에는 8개 교구, 7명의 주교, 2명의 교구장을 갖게 된다. 한국인 신부도 128명으로 늘었고, 신도도 18만 8천여 명을 헤아렸다. 1961년에는 서울대주교관구에 속한 독립된 인천교구가 설정되기도 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9년 마산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를 대주교로 승격시키면서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하였고, 다음해 3월 28일 그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1982년 12월에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보』를 창간하고, 곧 이어 북한선교위원회 설립을 인준한다. 1992년에는 구약성서의 새로운 번역의 첫 결실로 「시편」을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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