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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불교와 여주

조선시대의 불교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대표된다.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는 한편,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사전(寺田)에도 과세를 하였으며 승려의 궁중 출입과 도성(都城) 내 출입을 금하였다. 또한 연산군 때는 승과(僧科)를 폐지하고, 삼각산의 여러 절의 승려를 몰아내어 그곳을 놀이터로 삼았으며 원각사(圓覺寺)의 불상을 옮기고 그곳을 기관(妓館)으로 삼는가 하면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덕(興德)·흥천(興天) 두 절을 없애고 여승은 궁중의 노비(奴婢)로 삼고 승려들도 모두 환속(還俗)시켰다. 당시의 불교는 세종대의 불교 종파의 정비 결과 조계(曹溪)·천태(天台)·총남(總南)의 3종을 선종(禪宗)으로, 화엄(華嚴)·자은(慈恩)·시흥(始興)·중신(中神)의 4종을 교종(敎宗)으로 통합하여 선·교 양종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조선시대 여주를 대표하는 사찰은 신륵사이다. 이 사찰은 1454년(단종 2)에 간행된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에 “신륵사 재부북 속호벽사(神勒寺 在府北 俗號碧寺)”라 하여 벽사(碧寺)라 불렸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찬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봉미산(鳳尾山) 보은사(報恩寺)라고 하여 세종대왕릉의 원찰로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호칭은 『범우고(梵宇考)』가 간행된 1799년(정조 23)까지도 꾸준하게 지속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신륵사로 다시 불렸다.

이 사찰은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1379년(고려 우왕 5)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입적 후 크게 중창(重創)하였고, 1473년(성종 4)에는 영릉(英陵)의 원찰(願刹)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보아 고달사도 16세기까지는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에서 고달사가 폐사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18세기경에는 여주지역의 불교가 상당히 많이 약화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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