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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서원

여주지역 근현대 유림의 활동에서 매우 특기할 만한 사실의 하나는 다름아닌 매산서원(梅山書院)의 창건이라고 할 수 있다. 매산서원은 현재 여주시 능서면 번도리(번머리)에 소재하고 있는데, 당초에는 매산사(梅山祠) 또는 삼우사(三憂祠)라고 하여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의류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이름 높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을 제향하는 사당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던 것이 광복 이후인 1952년 문중(門中)의 한 명인 문상규(文相圭)가 여주경찰서장으로 취임하여 지역유림의 협조, 특히 한산 이씨 문중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매산서원으로 중창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매산서원의 출발은 본래 충선공별묘사(忠宣公別廟祠)에서 시작되었다. 즉, 성종대 좌찬성을 지낸 이파(李坡, 1434~1486)가 지은 「충선공별묘사기(忠宣公別廟祠記)」1)에 따르면 문익점의 후손인 남평 문씨(南平文氏), 또는 강성 문씨(江城文氏)들이 여주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그 증손인 문자신(文自愼)이 단종(端宗)의 화를 피해 번매리(番梅里)로 낙향한 데서 비롯되었다.

문자신은 1434년(세종 16)에 음사로 예문관 직강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의 지위에 올랐으나, 1456년(세조 2)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구명을 위해 노력하다가 용성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유배는 풀렸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여흥에 우거하였다.

문자신이 여흥에 우거한 데에는 한산 이씨와의 인연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문자신의 요청으로 「충선공별묘사기」를 지은 이파 자신이 한산 이씨임은 물론, 두 집안의 인연은 위로 이색(李穡, 1328~1396)의 부친으로 고려 말 성리학 도입기의 선구자의 한 사람인 이곡(李穀, 1298~1351)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문자신의 증조인 문익점이 이곡의 제자로 그 아들인 이색과는 도의지교(道義之交)로 교유함은 물론, 포은 정몽주와는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금란지계(金蘭之契)을 맺은 관계였다.2) 이러한 두 집안의 인연은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이색의 손자인 이계전(李季甸, 1404~1459)이 세조를 도와 소위 계유정난에 참여함으로써 집안의 흥망은 갈리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집안의 교유만큼은 그대로 이어졌던 듯하며, 그 아들인 이파와 문자신은 서로 지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남평 문씨와 한산 이씨의 교유가 이렇듯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광복 이후 두 집안의 협력도 결코 우연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1463년(세조 9) 그 증손인 문자신에 의해 충선공별묘사로 출발한 매산서원은 1634년(인조 12) 후손 문겸(文兼)에 의해 삼우사(三憂祠)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3) 이후 이색과의 교우를 참작하여 후손과 유림들이 목은(牧隱)도 함께 모시도록 하여 매산사로 사액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52년 당시 여주경찰서장 문상규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1978년에도 크게 보수하였다. 그리고 1987년에는 서원내의 사당을 헐고 다시 지었다. 매산서원의 향사일은 3월 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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