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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향교

향교는 고려시대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은 이래 지방교육을 담당하면서 유교문화의 상징적·구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중추적 국가기구의 하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전국 8도에 걸쳐 일원적인 행정조직이 구비됨에 따라 군현을 단위로 거의 모든 지역에 향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향교의 위상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16세기 새로운 향촌세력으로 사림계층이 성장하면서 국가 주도적 향교 중심의 교육기능이 점차 민간 주도의 서원을 중심으로 옮겨감에 따라 향교의 위상은 점차 위축되어 갔다. 즉, 지방의 인재 배출의 중심기구라는 기능은 상실되고, 선현에 대한 제향을 담당하는 상징적 기구로 전락해갔던 것이다. 다만, 유교의 종장인 공자(孔子)에 대한 제향을 주관하는 기구라는 측면에서 그 상징적 위상만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 중기 사림에 의한 서원 중심의 교육기능이 18세기 후반 이후 사림세력의 보수·경직화에 따라 점차 쇠퇴해감에 따라 향교의 위상은 다시금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즉, 서원 및 사우의 남설에 따라 분열되고 생산성을 상실해가던 조선 후기 유림사회는 향교를 중심으로 다시 그 본래의 위상과 기능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시도하였다. 18세기 후반 이후 각 지역의 유림이 향교를 중심으로 읍지(邑誌)를 편찬하거나 양사재(養士齋) 등을 건립하여 지역 인재의 육성과 지방 유림의 사기 진작을 도모한 것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림사회의 노력은 이미 때를 놓친 것이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더 이상 유림사회에 시간을 주지 않았다. 즉,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1896년 왕조정부가 과거제의 폐지를 선언함에 따라, 조선의 유림사회는 갑자기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그 충격을 완화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이 조선사회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본격적 침략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 갔고, 그 와중에서 향교의 위상 회복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1910년 한반도를 강제 병합한 일제의 기본 통치정책의 하나는 한민족의 말살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문화는 그 보존에서조차 위기를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향교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먼저 종래 향교를 대표하던 직책은 도유사(都有司) 또는 전교(典敎)로서 사실상 향권(鄕權)을 좌우하는 지위였으나, 직원(職員)이라는 기능적 직책으로 대체되었다. 광복 이후 그 명칭은 다시 전교로 회복되었으나, 향교 본래의 기능 회복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 향교가 석전제(釋奠祭)나 지내고 종래의 윤리규범만을 고수하는 상징적 기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대변화에 대응한 적극적인 혁신전략을 수행해갈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여주향교는 이미 고려 말에 가정(稼亭) 이곡(李穀)에 의해 마암(馬巖) 근처에서 창건되었다고 한다.1) 본래 이곡은 원나라에서 정동성 향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한림국사원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1334년(충숙왕 3)에 고려 정부로부터 본국으로 돌아와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음에 따라 귀국하여 직보문각을 제수 받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각처에 향교를 일으키는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었다. 아마 여주향교도 이즈음 창건된 것으로 전해오는데, 정확한 시점은 알지 못한다.

고려 말에 창건된 여주향교는 임진왜란을 맞아 병화(兵火)로 불타버림에 따라 재건의 기회만을 기다려오다가, 1601년(선조 34)에 옛 터에 복원되었는데 전후의 허술한 재정으로 공사가 이루어지다보니 50년 만에 붕괴의 처지에 직면하였다. 이에 다시금 향교의 중수가 논의되어 1651년(효종 2)에 자리를 옮겨 여주읍의 남쪽 고개인 백목현(栢木峴, 잣나무고개)에 12월 8일에 상량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백목현의 향교는 산능선에 위치하여 자리가 협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건 후 주위에 괴질이 유행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함에 따라 군민의 원성을 듣게 되어 다시금 이전이 논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1685년(숙종 11)에 다시 현재의 자리, 즉 여주시 교동 향교말로 이전 신축하게 되었다.

이후 그 위치의 변동 없이 현재까지 그 건물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향교의 운영은 전교를 대표로 하여 장의 6~7명을 선임하여 수행하고 있으며, 2월 상정일과 8월 상정일에 석전제를 봉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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