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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유교는 흔히 하나의 종교체계라기보다는 학문과 사상적 측면을 중시하는 하나의 교학체계로 이해되어 대개 유학이라 불러 왔다. 그러나 종교의 본질론적 측면에서 본다면 유교 또한 영혼에 대한 구원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신앙체계임은 분명하다. 다만, 유교의 시조인 공자(孔子) 스스로가 말했듯이 유교에서는 귀신이나 내세 등 보이지 않는 것, 또는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 다른 종교체계보다 상대적으로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따라서 공자도 단지 일반적 학자 이상의 존경대상으로 숭앙되어 왔다. 그리고 그 존숭은 점차 문묘(文廟)의 석전제(釋奠祭)라는 제례의식을 통하여 표현됨으로써 공자는 단지 교학의 조술 대상을 넘어 종교적 차원에서 받들어지게 되었다. 이 경우 유교는 바로 종교적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공자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스승으로 모셔지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한대(漢代)부터이다. 즉, 공자를 공구(孔丘)라는 이름 대신에 공자라 존칭하고, 그 무덤엔 공자묘라는 묘호를 추증했던 것이다. 이어서 후한의 명제는 공자묘를 찾아와 공자와 더불어 그 72제자들에게 제사를 올리면서, 종래 주공(周公)만을 모셨던 선사묘(先師廟)에 공자도 함께 배향하여 ‘선성선사묘(先聖先師廟)’라고 묘호를 격상시켰다.

당대에 들어와서는 예종이 공자를 선성(先聖)으로 높였으며, 현종은 720년에 선성묘에 10철을 종사하였다. 이어서 839년(開成 4)에는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이라 추존하고, 묘호도 문선왕묘로 고쳤다. 그리고 다시 북송의 진종은 1008년(고려 목종 11)에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라는 존호를 추가했다. 또 신종은 1084년(고려 선종 1)에 맹자를 종사하였고, 1241년(고려 고종 28)에는 5현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원대(元代)에 들어와서는 공자에게 다시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존호를 추가하였고, 명나라 때는 지성선사공자(至聖先師孔子)로 바꾸었다. 다시 청나라 때는 대성지성문선왕선사공자(大成至聖文宣王先師孔子)라고 존호했다가, 1657년(조선 효종 8)에는 다시 지성선사공자로 되돌리는 등 여러 차례 존호를 제정하면서 존숭의 대상으로 섬겨왔다.

우리나라에서 공자를 제향하기 시작한 것은 717년(신라 성덕왕 16)에 당(唐)에서 공자와 10철 및 72제자의 화상을 들여와서 국학에 봉안한 이후부터이다. 고려조에 들어와서는 국자감에 선성묘를 세우고 공자와 10철을 봉안하여 석전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987년(고려 성종 2)에는 박사 임성로가 송나라로부터 ‘문성왕도·제기도·72현찬기’를 들여왔으며, 원나라의 예에 공자의 존호는 지성문선왕이라 하였다.

1020년(고려 현종 11)에는 우리나라의 선유인 최치원을 배향하였고, 다시 1022년에는 설총을 배향하였다. 1309년(고려 충선왕 1)에는 안향을 추가로 종사하였고, 공자의 존호는 대성지성문선왕이라 하고 묘호도 대성묘로 바꾸었다. 이어서 1310년에는 공자의 소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으며, 지방에도 평양 및 성주 문묘에 최초로 공자의 소상이 봉안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는 내우외환이 잦아 석전례가 소홀해졌는데, 공민왕대에 이색 등의 노력으로 다시 정착될 수 있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1392년(태조 1)에 성균관에 문묘를 새로 세우고 공자와 4성 10철 6현을 배향하였으며, 태종대에는 72제자와 22현 및 최치원·설총·안향을 추가로 종사하였다. 그리고 1410년(태종 10)에는 명나라의 예에 따라 묘호를 선성묘에서 문묘라고 바꾸었다. 이어서 1453년(문종 7)에 대성지성지전을 대성전이라고 고쳤으며, 1519년(중종 14)에는 전국의 문묘 앞에 하마비를 세워서 존엄성을 높였다. 그리고 1574년(선조 7)에는 문묘의 공자 소상을 철거하고, 대신에 신주를 모시기 시작했다.

문묘에 배향된 유학자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를 보이면서 계속 증가되었는데 1883년(고종 20)에 들어와 대성전에는 공자를 주향으로 4성과 10철 6현이 배향되었으며, 동무와 서무에는 중국의 유학자 94명, 우리나라의 유학자 18명을 모시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석전제는 본디 간단한 채소만을 제물로 올렸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고기도 사용하였다. 제향은 조선시대부터 명나라의 예에 따라 상정일(上丁日)에 지내고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1915년부터 석전제의 명칭을 사공(社孔)이라고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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