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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라져 남한은 미군정을 실시하게 됨에 따라 교육도 미군정하에 실시하게 되었다. 미군정기는 1945년 8월 15일부터 대한민국 문교부가 과도정부 문교부로부터 사무인계를 받은 1948년 8월 15일까지이다. 광복을 계기로 한국의 교육은 전체주의적인 일제 식민지교육에서 벗어나 개인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자유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민주주의 교육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틀을 짜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식민지시대 교육체계를 정비하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은 미군정의 주도로 1945년 9월 16일 조선교육위회가 구성되면서 시작되었다.

1945년 9월 17일 미군정 학무국은 광복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면서 한국인이 원하는 대로의 교육제도를 갖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며,1) 일반명령 제94호를 통해 같은 해 9월 24일부터 초등학교가 수업을 개시토록 하고, 중학교 이상의 학교는 10월 1일부터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였다.2) 이에 따라 여주지역의 초·중학교도 일제히 문을 열고 해방 후 첫 수업을 시작하였다.

미군정은 1945년 11월 23일 교육심의회를 조직하고 조선교육위원회와 함께 한국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간 일제교육제도를 철폐하는 한편 교육연한과 학기제를 개편조정하고 종래의 이원제를 일원제로 고치는 등 새로운 교육제도를 제정함으로써 새로운 틀을 짜게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후 점차 안정되어가던 우리 사회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화(戰禍)속에 휩싸이게 되고 일제강점기 이후 또다시 혼란에 빠져 사회 각 분야는 피폐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교육이전에 생존이 문제되는 시기여서 교육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모든 국민이 생존을 위해 고향을 등지고 피난길을 떠나야 했으며, 교육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천막학교를 운영하는 등 교육에 대한 애정과 교육열로 2세 교육에 힘을 쏟았다. 3년여에 걸친 6·25전쟁은 전국에 걸쳐 많은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를 주었으며, 여주지역도 예외일 수 없었다. 6·25전쟁 중 각급 학교가 입은 피해액은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경기도사편찬위원회의 발표에 의하면, 당시 여주군 각급 학교의 피해는 아래 표와 같다.3)

앞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주군에 소재한 20개교 모두가 피해를 보았으며, 내용별로는 전파 1,657평, 반파가 3,134평, 합계 4,791평에 당시 화폐로 31억 6,071만 4,000환이었다.

6·25 전쟁의 발발로 여주지역의 모든 학교건물이 폭격으로 불타거나 파괴되고 교육행정이 마비되어 정상적인 수업을 할 수 없던 중에도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피난처에서 돌아온 학생들과 서울 등지에서 피난온 학생들을 규합하여 교육을 하는 등 포화 속에도 교육열은 매우 높았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자 사회는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며, 6·25 전쟁으로 인하여 소실되거나 파손된 학교시설은 미국을 위시한 우방국가의 원조와 여주의 주민 및 교육자의 열성적인 투자에 의하여 6·25 전쟁 이전의 모습을 능가하였다. 정부는 학교를 정상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교육의 질적 성장을 위해 의무교육 및 문맹퇴치에 심혈을 기울였다.4)

휴전이 성립된 후 여주는 초등학교 교육기관과 중등교육기관의 대폭적인 증가를 가져오는 등 교육의 급진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먼저 초등교육기관의 경우 1950년대 여주 지역의 신설 초등학교는 오산초등학교(1954), 송촌초등학교(1955)를 비롯하여 1958년에 매류초등학교, 오학초등학교, 1964년 능북초등학교, 1966년 여흥초등학교, 1968년 송삼초등학교 등 7개교와 점동초등학교 뇌곡분교장, 이포초등학교 하호분교장 등 7개 분교장이 신설되었다. 이로써 여주지역 초등학교의 수는 25개교로 증가하였으며, 이에 따라 학생수도 1940년대에 비하여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이와 같이 의무교육의 시행에 따른 초등학교 취학률의 증가는 초등학교의 급성장을 가져왔고 이는 중등교육의 확장을 요구하는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여주의 중등교육기관은 1945년 3월에 개교한 여주공립농업중학교 1개교뿐이었으며, 중등교육기관이 본격적으로 확대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였다.

여주의 중등교육기관은 1947년 종래의 여주공립농업중학교가 여주중학교와 여주농업고등학교(후일 여주자영농업고등학교로 개명)로 분리하여 개교한 것을 시작으로 1953년 여주여자중학교와 대신중학교, 1954년 여주제일중학교와 점동중학교, 1955년 세정중학교, 1959년 창명여자중학교, 1960년 이포중학교가 개교하고 1955년 대신고등학교의 설립에 이어 여주여자고등학교와 여주제일고등학교가 개교함으로써 본격적인 중등교육이 전개되었다.

이로써 이 시기에 여주지역의 중학교는 7개교가 증설되고 학생수도 3천여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고등학교는 3개교가 새로 설립되어 여주자영농업고등학교와 함께 4개교에 학생수 650여 명이 수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정부의 재정지원이 전혀 없던 시기여서 법인의 지원과 학부모들의 부담만으로 유지·경영하였으므로 궁핍했던 농촌에서의 학교경영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 여주군지역에 개교한 중등학교의 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5)

광복 이후 사회적으로 교육수효가 크게 팽창하였으나 국가의 교육재정이 빈약하였던 시기여서 사학이 중등교육의 보급을 통하여 한국교육의 양적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듯이 여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시기에 여주에 신설된 중학교 7개교와 고등학교 3개교 중 사립학교가 8개교였음을 보아 여주지역 중등교육 수요의 많은 부분을 사학이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의무교육의 확대로 학령아동 취학률이 급증함에 따라 중등교육의 확장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으나 정부는 전후 피해복구 등의 재정수요가 급증하여 중등교육시설을 확충할 여력이 부족하였으므로 이 지역사회의 이봉구, 임세흥, 김의환, 민달호, 신우범, 김연수 등 지역유지들이 앞다투어 후학과 2세 교육을 육성하기 위하여 막대한 재산을 출연하여 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한편, 광복 직후 여주 교육의 특징으로 공민학교와 고등공민학교의 설치를 들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여주지역에는 가남, 북내, 점동, 대신 등 각 면에 1개소씩 고등공민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들 학교들은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학생이나 적령기를 지난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설립되었으나 후일 공교육의 확대로 모두 공·사립 중학교 설립의 모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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