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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근대 교육기관(구한말에서 광복 이전까지)

향교와 서원 그리고 서당 등 전근대적 교육기관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일부 선택된 계층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었음에 반하여 1894년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식 교육은 신분의 차이 없이 모든 국민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중교육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말 갑오개혁 이후 8·15 광복을 맞기까지 여주에 신교육기관으로 가장 먼저 설립된 학교는 1904년 장춘명 목사1)에 의하여 설립한 가남면 삼군리의 개신학교(開信學校)와 점동면 청안리의 소성학교(韶成學校), 그리고 여주읍의 여흥학교(驪興學校)이다.2) 뒤이어 1908년에 여주심상소학교(현 여주초등학교의 전신), 1909년에 천양리의 신흥학교(新興學校),3) 1910년에는 삼신동에 교인 5명이 개신학교(開信學校)를 설립하였다.4)

이들 사립학교는 일제의 무단정치하에 사립학교를 탄압하고 정비하여 민족교육을 탄압하던 시기인 1910년경 모두 폐쇄되고 그 중 여흥학교는 1908년 여주초등학교의 전신인 여주심상소학교(여흥학교 → 여주심상소학교 → 여주공립보통학교)로 개편5)됨으로써 여주에서 최초로 근대식 학교의 모습을 갖췄다. 이어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 지금의 북내초등학교와 이포고등학교가 개교하고 1921년에는 가남초등학교, 1923년 점동초등학교, 1927년 대신초등학교 등이 개교하여 여주의 근대식 교육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뒤를 이어 많은 학교들이 개교하였다.

그 후 1929~1938년 사이에 1면 1교 개교를 목표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1930년 능서초등학교와 흥천초등학교를 개교하고, 1935년 천남초등학교, 1936년 점봉초등학교, 1937년 상품초등학교, 1938년 문장초등학교 등을 개교하였으며,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총 13개 학교를 개교하여 여주지역 근대식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뒤이어 1950년 이후 오산초등학교, 오학초등학교 등 많은 학교를 개교하였다.

이로써 여주의 모든 읍·면 단위에는 1개 이상의 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40년 여주군 관내 보통학교 학생수는 2,300여 명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에 교육의 팽창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초등교육 수준에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중등 및 고등교육기관이 약간 늘기는 하였으나 주로 농업, 공업, 상업, 수산 등 직업교육의 일환으로 제한된 형태의 학교였으며, 일반 중등 및 고등학교 취학의 기회는 거의 배타적으로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광복을 맞을 때까지 여주 중등교육기관으로는 해방되던 1945년 3월 31일에 설립한 여주공립농업중학교 1개교밖에 없었다.

광복 이전에 개교한 여주 내의 초등학교 및 중학교의 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6)

1920년대에 이르러 여주 교육의 특징은 공교육기관이 부족한 현실에서 교육수요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방법의 일환으로 서당(書堂)과 야학(夜學)이 성행하였다.

서당이 여주지역에 언제부터 유래되었는지 명확치 않으나 큰 동리에는 1개소, 자연부락에는 2~3개 리에 하나씩 개설되어 운영되었으며, 보통학교보다 많은 학생을 수용하여 1920년 초반에도 118개의 서당에서 1,106명이 수학하였다.7)

서당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공교육체계가 강화되면서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였으나 근대식 대중교육의 학제가 시행된 이후에도 상당기간 보통교육의 보조교육기관으로 유지되었고 광복 이후까지도 오랫 동안 존속하여 많은 지역주민이 서당에서 수학하였다.

한편, 여주의 종교인 및 유지, 그리고 청년회 등이 나라의 독립과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후세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야학을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신교육을 실시했다.

1920년대 전반기 천도교구가 여주읍에 설치한 천도교회강습회를 비롯하여 아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8개소의 야학이 설치되었다. 그 중 특히 1921년에 개신교 신자인 이수다(李壽多), 유인애(柳仁愛), 한윤희(韓允熙) 등이 여주읍내의 여자들에게 상식을 보급하고자 야소교회 내에 여자야학회를 개설하여 성경, 조선어, 산술, 한문 등을 매일 한 시간씩 가르치고, ‘가정교육에는 아버지의 힘이 많으냐, 어머니의 힘이 많으냐’ 등과 같은 토론회를 개최하여 주민들의 관심을 받았다.8)

이는 당시 교육에 소외되어 있던 여성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여성교인들이 앞장서 설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클 뿐 아니라 여주의 여성교육이 타지역에 비하여 일찍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주의 여자야학회는 안성읍내에 개설된 여자야학교, 가평군 북면에 개설된 부녀야학, 개성 남부에 개설된 여자야학회 등과 함께 경기도내 여성야학 교육기관 4개소 중 하나이다.9)

한편, 여주에 제일 먼저 천도교구에서 설립한 천도교회강습회는 교리, 역사, 간독, 법제, 경제, 조선어, 산술, 일어 등 많은 학문을 교수하는 강습회를 개최하고, 선교와 신학문 보급에 주력하였다.10) 그리고 개인이 설립하여 글을 가르치던 대신면의 보통리강습소(甫通里講習所)가 있었는데 1935년 3월 보통리 188번지 공회당(公會堂)에 개설하여 1945년 광복과 함께 폐쇄하였다. 농촌에서 생활이 어려워 공립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동들을 모아 초등학교 과정을 정규 교과서 이외에 한문과 한글 등을 감시를 피하여 4년제로 가르쳤는데 향학열이 매우 높았다.

대신면 율촌리·보통리·당남리·송촌리, 개군면 계전리 등에서 4~5㎞를 걸어서 통학했는데 신발을 신고 오는 학생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모두 가난하였다.

교사로는 설립자 조국현(曺國鉉, 1902~1967)을 비롯하여 이장명(李長命), 임융(林隆), 정찬국(鄭燦國) 등이 있었다.

사학인 야학은 정규 교육과정을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국어 해득과 계몽을 통해 문맹을 퇴치하고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과 자각을 불러일으키면서 민족의식을 유지·고취하는 중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 여주군 야학의 실태는 표와 같다.11)

1930년대에 이르러 여주 교육의 특징은 보통학교의 부설로 간이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대신보통학교의 부설로 천남간이학교가 설립되었고, 북내보통학교 부설로 도전간이학교(1930)와 주암간이학교(1934), 문장간이학교(1938), 금당간이학교(1936), 뇌곡간이학교(1939)가 설립되었다.

일제는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여주에 보통학교를 계속해서 신설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간이학교는 뒤에 보통학교에 편입되거나 보통학교로 승격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교육정책의 기조는 초등학교시설의 확대에 주력하였으므로 중등학교 교육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여주의 중등교육기관은 1925년경 여주읍에 설립된 농업실수학교 한 곳뿐이었으며, 이곳에서는 농업분야의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실업교육을 하는 정도였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1945년 5월 10일 여주공립농업중학교가 개교하고 초대교장에 박영목 교장이 취임하였다.

이렇듯, 광복 이전에는 여주에 중등 공교육기관은 광복을 맞던 해에 개교한 여주공립농업중학교밖에 없었으므로 보통학교 졸업생들은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웠다. 그래서 이들은 고등공민학교에 진학을 하거나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부는 서울 등 외지로 유학하였다.

광복 이전 일제의 공교육체제하에 여주의 사립 공교육기관은 전무하였고 다만, 유아교육기관으로 여주읍에 여주유치원 1개소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8·15 광복 이전의 여주의 교육체계는 당시에 비등하는 교육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을 만큼 매우 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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