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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서 사라진 추억의 증기기관차

수려선(水驪線)은 여주-수원 간을 운행하던 협궤(挾軌)열차다. 선로 폭이 표준 궤도보다 아주 좁은 협궤 철도로 유일하게 여주에서 수원과 인천까지 운행하여 ‘수려선’, ‘수인선’이라 하였다. 1931년 12월 1일 개통한 후 40년 4개월간을 운행하다 적자 운행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다가 1972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이용객들의 아쉬움과 추억의 향수를 느끼던 낭만의 열차로 기억을 남기고, 1972년 4월 1일 오후 “여주야 잘 있거라!”라는 현수막을 달고 화통에 화환을 건 증기기관차는 고별의 기적소리를 남기고 운행을 마쳤다.

수려선 꼬마 열차와 증기기관차가 사라진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 흔적은 사라졌지만 한때 여주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수려선 협궤 열차는 인기가 대단하였고, 여주의 쌀 등 토산물을 운반하고 인천의 해산물과 소금·석유 등 공산품을 수송했었다. 특히 여주와 이천지역의 젊은이들이 태극마크가 새겨진 어깨띠를 매고 이 열차로 논산훈련소에 입대하던 추억은 지금 60대를 맞는 그 당시 장정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 중앙신문과 간행물은 이 열차를 이용하여 수송되었고 기사 송고도 이 열차 편에 보내졌다. 그렇기 때문에 수려선은 여주의 새로운 문화를 수송하는 문화 철도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시속 10km에서 최고 70km로 달리던 느림보 열차는 한때는 지붕도 없는 화물칸에 승객을 태워 조개탄을 피워 추위를 면해야 했고,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야 했으며, 냄새 때문에 문을 열어놓고 가야 할 형편이었지만 승객은 불평하지 않았던 열차였다. 결행과 연착이 잦았던 기차를 타면서도 오히려 승무원에게 “기차가 잠이 덜 깬 것 아니냐”며 농담을 하면 승무원은 “일이 힘들어 조금 쉬었다 왔지” 하며 되받는 모습이 정겨웠다. 특히 용인을 출발하여 수원으로 향하던 열차가 용인의 ‘메주고개’를 넘을 때는 아래서부터 힘을 얻으려 하다가 미처 힘을 내지 못하면 다시 후진하였다 탄력을 받아 다시 오르는 힘없는 열차였지만 낭만과 추억이 깃든 열차라고 상기하는 여주읍 상리 이상철 옹은 수려선 개통 당시 신기한 열차를 처음 보고 흥분했던 70년 전의 일을 회상하기도 한다.

수려선은 1931년 경성철도주식회사 사장 다가와조지로(田川常治郞)와 전무 나이도신지(內藤眞治)가 본사를 수원에 두고 여주·이천의 쌀을 인천까지 운송하고 인천의 소금과 해산물을 수송하기 위하여 사설 철도로 여주에서 수원까지 73.3km를 개설하여 개통하였다. 경성철도주식회사는 남한강을 이용하는 여주에서 원주 및 충주를 내왕하는 수운까지 담당하면서 강원도와 충청도의 산물을 여주로 집결시켜 수려선을 통하여 수원으로 운송시켰다.

경성철도주식회사는 수려선에 이어 수원과 인천 송도를 잇는 총 연장 52km의 수인선 협궤철도를 착공 2년 만인 1937년 8월 9일 개통하였다. 그리하여 수려선으로 수송한 쌀 등 농산물을 인천까지 운반하고 염전지대인 경기만의 소래·남동·군자 등에서 생산하는 소금을 운반하는 사설 철도를 운영해오다 광복 후 1946년 5월 10일 국유화하였다. 해방 이후 농산물과 인천의 소금생산량이 줄어들었고, 육로교통이 활성화되면서 속도 또한 느려 이용객의 인기가 크게 떨어져 경영 악화로 심한 재정난을 겪게 되어 1972년 폐선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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