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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생산 현황

우리 민족은 장구한 역사를 통해 수많은 외침과 시련을 극복하고 찬란한 문화를 창조해냈지만 늘 식량 부족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식량생산의 증대는 민족의 숙원이었으며 오랜 기간 녹색혁명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식량자급이 국정의 우선 목표가 될 정도로 비중이 컸다.

1948년 건국 이후 혼란한 사회와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농업증산 3개년계획(1949~1951)을 수립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시행하지 못하고 농업증산 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1955년에는 쌀 2,054만 석을 사상 처음으로 생산하였으나 풍흉의 기복이 심하였고 농가경제의 침체는 계속되었다.

1960년대는 경제안정을 위한 농업생산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토지개량사업법, 개간촉진법등을 제정하여 1967년까지 20만ha의 농경지가 조성되었으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공과 함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1971)이 추진되었고 식량증산과 농가소득의 안정적인 생산기반 확보를 지원하기 위해 1967년에 농업기본법과 농업재해대책법 그리고 농지조성법 등을 제정, 고미가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밭작물은 1960년대가 생산 최성기였는데 맥류는 1961년 처음으로 1,000만 석 시대를 열면서 1965년에 93만ha로 최대 재배면적을 기록하였고 1969년에는 1,380만 석을 생산하여 우리나라 최대 맥류생산기록을 보였다. 주류는 1968년에 37만 5,000ha로 최고에 달하였으며 서류는 1960년대 들어 주정원료인 당밀대체작목으로 20만 8,000ha에 달하였다.

1970년대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으로 농민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시대다. 1971년 이후 다수확 신품종(통일벼)이 개발되어 1974년에는 전체 논 면적의 15%에 통일품종을 재배하고 쌀 3,000만 석 돌파작전을 추진한 결과 3,086만 석을 생산하였고, 1977년에는 논 면적의 54%에 통일형 품종을 재배하여 쌀 4,170만 석을 생산해냄으로서 10a당 쌀 생산량 494㎏이라는 세계최고 수준의 기록을 내면서 우리 민족의 숙원이었던 주곡자급, 즉 녹색혁명의 위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1980년대는 유례없는 냉해로 3년 연속 대흉작을 기록함으로서 쌀 자급기반이 흔들려 다시 식량위기가 닥치게 되었다. 또한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이농으로 농촌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져 농업기계화촉진법이 시행되었다.

1982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된 이후 계속 풍작을 이루었고 1988년에는 최고기록인 4,200만 석에 10a당 480㎏을 달성하여 쌀 자급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도시화·산업화에 따른 경지면적 감소와 함께 과수 등 소득작목으로의 빠른 전환으로 1988년부터는 벼 재배면적이 지속적으로 감소되기 시작하였고, 맥류, 두류, 서류 등 밭작물은 소득이 낮고 일손도 부족하여 재배면적이 급격히 줄어드는데다가 축산물 소비 증가에 따른 사료곡물 수입확대로 곡물자급도가 1975년 73.0%에서 1990년 43.1%로 크게 낮아졌다.

1990년대는 농지의 다목적 이용과 전용을 제한하기 위해 1973년에 제정한 「농지보전과 이용에 관한 법률」을 개정 또는 폐지하고 「농어촌 발전특별조치법」과 「농지법」 등을 제정하여 농지규제를 대폭완화함으로서 농지의 타목적 활용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냉해로 인하여 쌀 생산량이 4,000만 석에서 3,500만 석 수준으로 급격히 떨어짐으로써 1995년 12월 ‘쌀 생산 종합 대책’과 1996년 6월에 ‘쌀 산업발전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제2의 쌀 증산정책에 돌입함으로서 1996년 3,696만 석(10a당 518㎏) 등 연속 대풍을 이루어 주곡의 자급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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