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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공화국 시기의 정당과 정치조직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정국이 혼미에 빠지자, 이른바 신군부 세력은 12·12 사태와 1980년 5·17 조치를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그들이 기획한 정치구도에 따라 정당창출 작업에 들어선다. 실제로 많은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이 규제된 가운데 정치가 재개되었다. 다당제 논리에 따라 여당인 민주정의당을 비롯하여 야당으로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이 창당되었으나, 신대통령제하의 정당은 대통령의 들러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 인위적 정치구도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을 중심으로한 강성야당인 신한민주당 창당과 이의 발전적 형태인 통일민주당의 출현으로 큰 변화를 겪으나.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후보에 나섬으로써 야권은 다시 분열된다. 역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종필을 중심으로한 구공화당 출신의원 중심으로 신민주공화당이 창당되므로 4당이 분립한다.

민주정의당은 1981년 1월 15일 창당대회에서 초대 총재에 전두환을 선출하는 한편, 그를 대통령에 지명하고, 이어 제11대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제11대 국회의원선거(1981. 3. 25)에서 새로 부상한 신한민주당이 1985년 1월 창당하여 돌풍을 일으키고 또한 1987년 가열되는 민주화운동에 밀려 마침내 직선제 합의개헌을 골자로 하는 8개항의 소위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1985년 1월 이민우를 총재로 창당한 신한민주당은 기존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후 통일민주당을 출범(1987. 5. 1)시켰고, 이어 민주당은 김영삼 총재를 중심으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와 함께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주도한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를 둘러싼 양김간의 갈등은 심각한 당 내분으로 번져, 급기야 김대중이 민주당과 결별, 자파의원들로 평화민주당을 창당(1987. 11. 12)하고, 대통령후보로 나서는 등 3김이 분열되어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와 야권의 3김이 경합하게 되었으며, 선거 결과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한편 제5공화국 시기 여주에서는 1980년 11월 22일 0시를 기해 계엄사령부가 정당 창설을 위한 옥내집회를 허용하자 각 정당들은 신당의 조직에 들어갔다. 같은 해 12월 중 제4지구(성남, 여주, 이천, 광주)에 나타난 각 정당과 이들의 지구당위원장은 다음과 같다. 즉 민정당은 정동성, 민한당은 윤성만, 민주사회당은 안재훈, 민권당은 황두영, 사회당은 정봉일, 위민당은 김문찬, 농민당은 박진서, 기민당은 김찬묵 등이다.

그러나 1981년 2월 대통령 선거인단선거(1981. 2. 11)와 대통령선거(1981. 2. 25)를 급조된 조직으로 치르고 난 다음, 그 동안 난립했던 정당들도 정비되어 민정당, 민한당 그리고 한국국민당만이 남게 되었다. 1981년 3월의 제11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후에는 정당개편이 있었는데 1981년 2월 26일 새로 편성된 제9선거구(여주, 이천, 용인)에서 민정당 지구당위원장은 제11대 의원으로 민정당 경기도지부위원장을 겸하던 정동성이 선임되었다. 이 무렵의 각 정당들의 지구당 요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민정당은 위원장 정동성, 부위원장은 임병두, 박노성, 전재선,이영문, 문영준, 이상열 등이다. 한편, 민한당 위원장은 조종익, 부위원장은 김풍식, 신우현, 정만영 등이다.

1983년 초에 각 정당들은 다시 개편대회를 가졌는데 제9지역구내의 각 정당 내에는 기본골격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제7선거구에 제5공화국의 시작을 전후해서 정치활동의 재개와 더불어 등록된 바 있는 정당과 지역구 당 대표자는 아래 표와 같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지역구당의 본부가 여주군에 위치한 것은 하나도 없고, 여주군에 연락소를 두거나 그것도 있지 않았다. 1985년의 국내정계에서 실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이들 중에서 민주정의당, 신한민주당, 한국국민당, 그리고 민주신한당뿐이다.

1984년 말경에는 제3차 정치활동금지 대상자들의 해금 결과로 신민당의 조직이 여주가 포함된 새로운 선거구인 제7지역구(여주, 이천, 용인) 내에도 생겨나게 되었다. 1984년 현재 제7지역구 지구당위원장은 다음과 같다. 즉 민정당은 정동성, 신민당은 구재춘, 민한당은 조종익, 국민당은 박창희 등이다. 1984년에는 인천의 직할시 승격으로 인천의 2개 지구가 경기도로부터 분리되어 경기도에는 10개 지역구만이 남게 되었는데, 1986년 여주지역에 위치한 각 정당의 지구당 요직은 다음과 같다. 즉 민주정의당은 위원장에 정동성, 부위원장은 임병두, 박노성, 김정규, 김재선, 이영문, 문영준, 차상수, 김교정, 변시중, 김학규, 임관순, 이경완, 김송현, 최영철, 이항묵, 윤길남 등이다. 신한민주당은 위원장에 조종익, 부위원장은 이종구, 이경재, 김기성 등이다. 한국국민당에 위원장은 박창희, 부위원장은 김선성 등이다.

1988년 3월 17일 국회의원선거법개정으로 소선거구제를 채택함에 따라 각 정당의 여주군지구당 등록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두 야당후보의 분열로 모처럼의 민주적 정권교체의 기회가 사라져버린 후, 제6공화국에서 처음 실시된 제13대 총선(1988. 4. 26)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의 정국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여소야대의 정국은 1990년 1월에 이루어진 민정당, 통일민주당 및 신민주공화당 간의 3당통합으로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출범하면서 다시 여대야소의 옛 모습으로 환원되었다. 무엇보다 오랫 동안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김영삼의 여권진입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한편 야당세력으로 김대중의 평민당과 왜소화된 민주당, 그리고 바야흐로 장외에서 제도정치권으로의 진입을 시작한 재야세력이 남았다. 또한 1989년, 1990년에 걸쳐 재야세력은 이합집산을 거치면서 1991년 초까지 모두 제도권으로 진입하였다. 기층민중의 이익을 대표하고 나선 민중당은 독자정당으로 창당(1990. 11. 10)하였으나, 다른 세력들은 기존야당에 흡수되었다. 그 과정 속에서 평민당은 신민주연합당으로 새출발하였다(1991. 3. 23). 이후 신민당과 민주당과의 야당통합을 위한 협상이 계속되어 김대중과 이기택을 공동대표로 하여 통합야당으로 민주당이 출범(1991. 9. 10)했다. 한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제14대 총선을 눈앞에 두고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3당 통합으로 민자당이 출범한 이후, 제14대 총선(1992. 3. 14)을 거치면서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는 무너지고, 아울러 ‘보수 대 진보’의 정치구도도 실패했다. 1992년 12월에 실시된 제14대 대통령선거는 여전히 지역주의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민자당 김영삼 후보가 유효투표의 41.4%인 총 997만 표를 얻어 804만 표(33.4%)를 얻은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바야흐로 문민시대를 열었다.

이 당시 여주지역의 경우, 1988년 3월 17일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으로 소선거구제로 변경함에 따라 각 정당은 여주군지구당 등록을 하였다.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총선거에는 민정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등이 전국적인 차원에서 출마하였다. 여주에는 민정당은 정동성, 통일민주당은 이규택, 신민주공화당은 권혁준이 위원장이 되어 지구당을 이끌었다. 그후 1990년 2월 15일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통합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함으로써 여주에서도 민주자유당이 당시 국회의원인 정동성을 위원장으로 지구당이 등록되었다. 따라서 1992년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선거는 민자당의 정동성, 민주당의 이규택이 각 당의 지구당 위원장 자격으로 공천을 받아 출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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