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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공화국 시기의 정당과 정치조직

박정희 대통령은 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당선되어 임기가 1971년까지였으나, 3선개헌으로 1975년까지 연장되었다. 그러나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하자 1972년 10월 제3공화국 헌정질서를 뒤엎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였다. 유신헌법은 대통령 직선제를 없애고 국회의원 선거구는 종래의 소선거구제에서, 1구에서 2인을 선출하는 중선거구로 바꾸었다. 이 당시 여당의 조직은 민주공화당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정회의 이원적 여권 조직을 운영하였다.

야당은 제4공화국 말에 이르기까지 신민당 당수는 유진오, 유진산, 김홍일, 김영삼, 이철승으로 교체, 승계되었다. 당내 파벌간 다툼이 치열하여 지도체제의 변화가 잦았고, 간혹 폭력이 난무하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전당대회나 후보지명대회가 끝나면 표결결과에 승복하는 자세가 신민당의 저력이었다. 초기에는 원로들이 당 운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나, 1970년 대통령 후보 지명에서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등 이른바 ‘40대 기수’들이 치열한 경합을 벌리면서 당 리더십은 점차 세대교체를 시작한다.

1974년 유진산 총재가 서거하자 명사시대는 드디어 종언을 고한다. 이후 경색된 유신체제하에서 강경노선의 김영삼과 참여하의 개혁을 내세운 이철승 간의 팽팽한 당권싸움이 계속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위원선거에서 1.1%의 근소한 차이로 득표율에 있어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에 앞서 크게 기세를 올린다. 1979년 김영삼이 다시 당 총재에 복귀, 강경노선을 펼치다가 10·26사태를 맞는다.

1961년 5·16 정변으로 혁신운동은 사실상 동면상태로 들어갔다. 진통 끝에 1967년 봄에 통일사회당과 대중당이 창당되어 혁신정당의 명맥을 이어오다가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 정당 활동을 중지당해 단명으로 그친다. 이후 통일사회당이 다시 창당(1973. 7. 12)되었으나 당시의 억압적 상황은 진보정당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제4공화국 출범 초기인 1972년 10월 유신이 있던 해이고, 소위 유신헌법이 공포된 해이다. 이 새 헌법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구가 생겨 대통령과 국회의원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소위 유정회 의원들을 선출하게 되었다.

1973년 2월에는 유신헌법에 의한 첫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에는 종래의 소선거구제가 아닌 중선거구제가 채택되어 한 선거구에서 2명의 의원을 뽑게 되었다. 따라서 한 선거구에서 여·야에 각 1명씩 2명의 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대통령 선거가 유신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로 넘어가고, 표면적으로 적어도 국민회의의 대의원은 정당인이 아니어야 했기 때문에 지역의 정당활동은 그만큼 위축되었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1973. 2. 27) 때만 해도 경기도에는 16개 지구당이 편성되어 있었으나 이 선거가 끝난 후 4월에 중선거구라는 개념에 따라 도내의 8개 지구당으로 개편되어 여주군은 성남(1973. 7. 1, 출장소에서 시로 승격), 이천, 그리고 광주와 함께 제4지역구로 편입되었다. 2월의 선거 때에는 역시 제4지역구였으나 성남시가 포함되지 않았다. 시승격 전까지 성남은 광주군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여주군이 속한 지역구에 관한 한 명목상의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제9대 국회의원으로는 이천에 근거를 둔 차지철(공화)과 광주에 근거를 둔 오세응(신민)이 당선되었는데 이들이 각각 공화당과 신민당의 제4지구당 위원장을 겸하게 되었다. 선거가 끝난 후 공화당은 경기도 지부를 연락실로 격하시켰고, 신민당은 도지부를 아예 없애버렸다. 이것은 소선거구제가 중선거구제로 되었고 정당이 대통령 선거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사정에서 온 여파였다.

1974년 8월 15일의 8·15 경축식장에서 있었던 대통령 저격사건으로 인해 공석이 된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현직의원인 차지철이 임명됨에 따라 그는 의원직을 사퇴하고, 따라서 그의 나머지 임기 중 제4지역구의 공화당 의원석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이런 변동으로 인하여 8월 말에는 공화당 제4지구당의 대표로는 부위원장 김종환이 위원장대리로 임명되었다. 신민당 지구당위원장은 제4지구의 유일한 현역의원으로 남게 된 오세응이 계속 맡고 있었다. 1974년 초는 헌법논의의 분위기가 높아지자 1월부터 4월까지 일련의 긴급조치법이 발동되었다. 제1호(1974. 1. 8)는 헌법을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의 주장을 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헌법논의의 파고를 막기 위해 1975년 2월에는 유신헌법에 대한 신임을 묻는 두 번째의 국민투표(1975. 2. 12)가 있었고 여주군의 경우 투표자의 82.9%가 찬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1975년 현재 각 정당의 지구당(제4지구) 임원은 다음과 같다. 민주공화당의 위원장대리는 김종환, 신민당 위원장은 오세응이었다. 1976년에 들어와 공화당은 도내 8개 지구에서 개최한 도당개편대회(1975. 5. 10~24)에서 공석으로 있던 제4지구당 위원장에 정동성을 선출했다. 1978년에 들어와 정계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이는 5월에 있을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와 12월에 있을 국회의원선거에 대비하여 각 정당은 조직을 개편, 확대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제4지역구에서는 이 과정에서 신민당의 현역의원인 오세응과 중앙당상무위원인 유기준(양자 모두 광주 출신)이 경합을 벌인 결과 오세응이 신민당 공천에서 탈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오세응은 지구당을 해체하였다. 공화당에서는 정동성과 김명진이 경합했으나 현역의원인 정동성이 공천을 획득하였다. 그후 재정비에 들어간 양당의 제4지구당(성남, 광주, 이천, 여주) 요직은 다음과 같았다.

즉 공화당의 위원장은 정동성, 부위원장은 김종환, 한녹순, 박운한, 신태균, 이명동이었다. 한편 신민당은 위원장은 유기준, 부위원장은 이윤수였다. 신민당의 지구당위원장은 원래 오세응이었으나 9대 국회의원이었던 그가 신민당 공천에서 탈락하고 중앙당 간부인 유기준(광주 출신)이 공천을 받자 오세응은 지구당을 해체하고 말았다. 따라서 유기준은 지구당을 새로 편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해 12월에 있던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한 오세응이 당선되었다. 이로써 오세응은 다시 신민당으로 돌아와 지구당을 되찾았다. 정동성은 청와대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의 뒤를 이어 민주공화당의 지구당을 차지하게 되었다.

12월의 제8대 국회의원선거(1978. 12. 12)에서는 정동성(공화당)과 신민당 공천에서 탈락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오세응이 당선되었다. 한편 제7대 국회에서 여주와 양평을 대표했던 천명기는 다른 지역구(연천, 포천, 가평, 양평)에서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는 7명의 후보가 경쟁을 벌였으나 실제로는 정동성, 오세응, 유기준 3인의 경쟁이었는데 유기준이 오세응보다 1만 4,300표 부족으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정동성은 여주 출신으로 초선이었으며, 오세응은 3선이었다. 한때 여주지역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바 있던 양평에 기반을 둔 천명기는 연천, 가평, 포천, 양평을 포함하는 제8지역구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 그는 양평 출신이었다.

1978년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은 5월 18일에 있었던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7월 6일의 국민회의에서의 제9대 대통령선거(박정희 후보 당선), 10월 중의 제10대 국회의원후보의 정당 공천, 그리고 12월 12일의 제10대 국회의원선거 등이었다. 또 12월 21일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제3대 유정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이를 마지막으로 정국은 운명적인 1979년 10월 26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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