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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시기의 정당과 정치조직

제2공화국은 민주당의 분열과 국민들의 참여 욕구 분출로 인하여 무질서와 정치 불안이 계속되어 결국 박정희 소장이 주동이 된 쿠데타로 정권이 무너지고 한국정치사상 최초로 군사정권이 수립되었다. 경제성장과 안보를 앞세우는 군부권위주의 체제에 의해 지배된 박정희 정권은 민주적 정치과정 대신에 기술관료의 합리적 기획과 문제해결에 크게 의존하였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하의 정치과정에서 정당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으니, 군부파시즘의 제도적 장식물에 불과했다. 이른바 5·16 군사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은 1963년 1월1일 정치활동의 재개를 선언했다. 신당 창당을 위한 사전조직을 진행시켜온 김종필 등 혁명주체세력은 곧이어 민주공화당 창당준비대회를 개최하였으며(1963. 2. 2), 공화당은 창당 초기부터 사무국 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원외정당체제의 구축을 꾀했다.

그러나 김종필은 혁명주체 중 반김세력과 구정치세력이 결속된 비주류의 반발에 부딪혀 2차례에 걸친 외유에 나섰으며, 그의 작품인 이른바 이원조직은 끝내 허물어진다. 이후 정치과정에서 당의 비중은 점차 약화되어 7대 국회 이후 당은 행정부에 예속된다. 특히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성립되면서 박 대통령은 정일권 국회의장, 백두진 유정회 대표, 이효상 공화당의장의 3인으로 유신체제의 골격을 세웠다. 유신체제가 장기화되면서 정책형성과정에서 공화당의 비중은 더욱 위축되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5·16 정변 이후 긴 휴식기간을 지나 정치활동이 재개된바, 재야세력의 이합집산이 시작되었다가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계기로 민중당으로 1963년 3월 30일 통합하였다. 이후 한일협정을 저지하기 위한 격심한 당내 이견으로 통합 3개월 만에 강경파가 분가하여 신한당을 창당하였으나, 1967년 2월 총선을 앞두고 이른바 4자회담(윤보선, 유진오, 이범석, 백낙준)에서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져 통합야당인 신민당이 1967년 2월 7일 창당되었다.

이 당시 여주지역의 정당 및 정치조직은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으로 대별될 수 있다. 즉 일시 금지되었던 정치활동이 1963년 1월 1일을 기하여 재개되자 집권세력을 대표하는 민주공화당, 준여당으로서 민주공화당과 합류하려다 실패한 자유민주당, 자유당과 대립해 싸워오던 민주당과 민정당, 국민의 당 등 12개의 정당이 난립하게 되었다.

한편 가장 먼저 창당을 한 민주공화당은 11월에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1963. 11. 26)에는 처음으로 군 경계를 초월한 선거구에 따라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여주는 양평군과 함께 제7지역구에 포함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당활동도 군 경계를 벗어나게 되고 이는 곧 여주군 밖에 지구당 조직의 본부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의미했다. 제7지역구에서 공화당 지구당 위원장은 양평 출신인 이백일이었다. 주요한 야당들인 자유민주당, 국민의 당, 민주당 그리고 민정당도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 후보를 냈으나, 야당들이 수없이 분열된 상태에서 제대로 군경계를 넘어서는 조직을 갖출 수 없었다. 이 선거(1963. 11. 26)에서 군 출신인 공화당의 이백일이 당선되고 민주당의 박주운은 차점으로 패했다. 당시 선거에는 최초로 전국구의원이 탄생했는데 공화당소속이 24명, 민정당(윤보선계)이 14명, 민주당이 5명, 자유민주당이 4명이었다. 특히 이 선거에서 후에 여주 선거구와 인연을 가지는 차지철이 공화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1967년의 대통령선거(1967. 5. 3), 제7대 국회의원선거(1967. 6. 8)를 앞둔 1966년에 제7지구(여주군과 양평군)에는 공화당, 민중당, 신한당 그리고 자유당의 조직이 있었다. 공화당에서는 현역의원인 이백일(양평 출신)이 지구당을 대표하고 있었고, 당의 공천에서 유용식과 박인종이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민중당은 천명기가 대표하고 있었고, 신한당은 박주운이, 그리고 자유당은 전 국회의원 김의준이 대표하고 있었다.

당시 민중당은 제1야당이었는데 민중당은 1966년 5월 3일 민정당(윤보선계)과 민주당이 통합하여 창설된 새로운 정당이었다. 같은 해 7월에는 한일조약비준저지라는 명목으로 윤보선계는 야당의원 총사퇴를 주장하고 나왔다. 이것은 끝내 이들 일부 강경파의 통일야당 이탈(11월 1일)이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뒤에 제11대 국회에 진출(1981)한 조종익은 민중당 소속으로 안성·용인구에 출마했다. 그래서 지방에도 신한당의 간판이 나붙게 되고 둘이 야당으로서 경쟁하게 되었다.

1967년 초에 제7선거구에 등록된 정당은 공화당(1967. 4. 11), 민주사회당(1967. 3. 12), 대중당(1967. 3. 22) 및 통일사회당(1967. 3. 12) 등이 있었다. 그러나 6월의 국회의원선거에는 민중, 신민, 공화, 통일사회당 등의 후보자들이 출마하였으며, 자유당의 조직은 없어졌다. 신민당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기 전 마지막 순간에 민중당(유진산계), 신한당(정일형계)과 그 밖에 일부 재야인사가 통합하여 급조된 구민주계의 정당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창당되면서 제1야당으로 발돋움했다.

1967년 현재 제7지구(여주, 양평) 당 요직을 보면, 민주공화당은 위원장 이백일, 부위원장 유춘만, 맹흥렬, 이초희 등이다. 한편 신민당은 위원장 천명기, 민중당은 위원장 유인설 등이다. 이들은 모두 양평 출신이었다. 그해 6월에 있었던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이백일(공화)이 재선되었다. 신민당의 천명기는 이 선거에서 차점이었으며, 이외에도 민중당(유인설), 통일사회당(간만규), 그리고 민주당(박주운)이 있었다. 1969년에도 지구당 요직의 변동은 없었다. 이해에는 3선개헌(1969. 9. 14)이 있던 해였으며, 1970년에 들어와 중요한 사건은 신민당의 대통령후보로 김대중이 전당대회(1970. 9. 29)에서 지명된 일이다. 이해에 여주를 포괄하는 제7지구당의 요직에는 공화당이나 신민당에서 변동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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