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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 시기의 정당과 정치조직

이승만 대통령하의 제1공화국의 정당정치는 보수세력 내부의 권력투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고, 정당체제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을 중심으로 보수양당체제로 발전하였다. 물론 대동청년단, 일민구락부, 여자평민당 등이 있었으나, 이들 정당들은 정치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승만이 초대 내각 구성에서 한민당을 소홀히 대접하자, 집권당을 기대하던 한민당은 이 대통령과 결별하게 되며, 이에 한민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표방하며,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의 신익희 세력과 대동청년단의 지청천 세력을 규합, 민주국민당을 1949년 2월 10일 결성했다.

한편 민주국민당의 출범에 자극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노동자, 농민을 위한 정당이 필요하다는 뜻을 밝히며 신당 창당을 제안, 1951년 12월 23일 자유당을 창당함으로써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보수양당체제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자유당 주도하의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1954. 3. 27)에 분개한 야당의원들은 대여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범야당 연합전선으로 호헌동지회를 결성(1954. 4. 1)하고, 이를 기반으로 재야세력을 규합하여 1955년 9월 18일 민주당을 창당했다. 민주당은 구민국당계 이외에 홍사단계(장면·정일형)와 자유당 탈당계(현석호·이태용) 등이 합류하여,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고,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선전함으로써 강력한 야당으로 부상했다.

한편 민주당에 가입하지 않은 혁신계 인사들(서상일, 조봉암, 박기출, 이동화, 김성숙 등)은 1955년 11월 가칭 진보당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 후보를 지명, 이 선거에서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는 비록 이승만에게 패배하였으나, 216만 표(이승만 504만, 신익희 추모표 183만 표)를 획득함으로써 여야의 보수세력을 위협하기에 족했다. 추진위원회는 우여곡절 끝에 죽산 조봉암을 위원장으로 하여 진보당을 창당(1956. 11. 16)하였다.

한편 제1공화국 시기인 6·25전쟁 직전인 1950년 5월경까지 여주군에는 진정한 정당조직이란 없었다. 가장 뚜렷한 조직을 가졌던 것은 대한청년단으로서 여주군 단장은 오덕섭이었다. 이 조직은 준군사조직이었다. 이 밖에 현직(제헌)의원이 이끌던 일민구락부의 조직이 있었고 여자평민당의 조직이 있었다. 후자는 전국에서 2명의 후보를 제2대 국회의원선거(1950. 5. 30)에 냈을 뿐이었는데 그중의 한 명인 강신상(신문업, 서울 소격동 거주)이 여주군에서 출마하였다. 일민구락부는 전국적으로 19명의 후보를 냈다. 대한청년단은 전국적으로 60명의 후보를 냈으므로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유일의 정당이라 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는 서울지방법원 여주지원장을 지낸 변호사였던 무소속의 김의준이 다른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1956년은 대통령과 부통령선거(1956. 5. 15), 시·읍·면장 및 시·읍·면의회 의원 선거(1956. 8. 8)가 있는 해였는데 이해 초에 자유당은 이기붕을 중심으로 재편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창당부터 공적이 많은 이갑성과 배은희 등이 제거되고 또 당의 기간단체인 국민회의 이활계의 인물을 제거하였다. 이들 제거된 일파와 1953년 이후 숙청된 족청계가 이기붕의 자유당 주류에 대항해서 정치세력을 규합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 무렵 자유당에는 인물의 빈곤을 겪고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많은 인사들이 새로 자유당에 영입되었는데 이때(1956. 1. 23) 김의준도 다른 헌정동지회 출신 의원들과 함께 자유당에 입당했다. 그는 정·부통령선거 후인 6월에는 자유당의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여주지방지원 판사 출신이고 여주 출신으로서 1950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가 부산에서 발췌개헌안을 둘러싼 부산정치파동(1952. 7. 4)을 겪었고, 수복한 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다시 당선되었던 것이다. 이때도 그는 무소속으로 출마했었다.

자유당은 피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우세한 국회 내의 반대세력 앞에서 1952년에 있은 제2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해서 만든 정당이었다. 수복 후 여주군에도 자유당 조직이 생겨나게 되었다. 1954년경에는 이봉구가 자유당을 업고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다가 무소속의 김의준에게 패배했다. 1956년 김의준이 이기붕이 주도권을 잡은 자유당에 입당함으로써 여주군의 자유당 조직은 김의준에게 넘어갔다. 이 무렵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부산 파동의 여파로 생긴 호헌동지회가 모체가 되어 주로 흥사단계와 민주국민당계가 주축이 되어 발족(1956. 9. 19)하게 된 것이다. 지도자는 신익희, 조병옥, 장면 등이었다.

따라서 여주군에도 민주당의 군당조직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민주당 여주군당위원장은 박주운이었고, 부위원장 겸 읍당위원장은 오덕섭이었다. 박주운은 제4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1958. 5. 2)에 민주당 공천후보(이때 처음으로 공천제가 실시됐다)로 출마했으나 자유당 공천의 김의준에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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