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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제16대 대통령 선거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국민의 저항과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대통령에게 집중시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한 제5공화국 헌법 개정을 둘러싼 민주화 요구는 거세졌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민주화와 개헌을 강압적으로 저지하여, 결국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민주적 항쟁에 직면한다. 그 결과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6·29 선언과 전두환 대통령의 담화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조치를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987년 10월 27일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 합의에 의한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함으로써 제6공화국 헌법이 완성되었다.

1987년 12월 16일 새로 개정된 제6공화국 헌법에 의해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 이래 줄곧 간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을 선출해오다가 16년 만에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된 것이다. 민자당의 노태우 후보, 민주당의 김영삼 후보, 평민당의 김대중 후보, 공화당의 김종필 후보, 사민당의 홍숙자 후보, 일민당의 김선적 후보, 통일한국당의 신정일 후보, 무소속의 백기완 후보 등 8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다.

특히 전국 평균 89.2%라는 높은 투표율은 국민 직선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 국민들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였다. 1노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중 비교적 전국적으로 고른 득표를 한 노태우가 유효투표수의 36.6%를 얻어 당선되었다. 여주는 전국 평균보다 약간 낮은 투표율인 88.2%를 보였다. 후보자별 득표율은 노태우 후보가 56.0%로 전국 평균을 앞질러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김영삼 후보와 김종필 후보에게는 각각 27.5%와 5.2%의 전국 평균과 유사한 지지를 보냈지만, 김대중 후보에게는 10.9%라는 낮은 지지를 보냈다.

노태우 후보는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하여 민주정의당 중심의 정국운영이 어렵게 되었다. 이후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을 선언했고 이에 따라 2월 9일 민주자유당이 공식 출범하면서 ‘여소야대’ 구도는 순식간에 216석의 거대여당과 왜소한 야당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한편 1990년 12월 31일 1980년대 이래 줄곧 민주화의 중요 쟁점의 하나였던 지방자치 제도의 도입을 위한 지방자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이에 따라 1991년 3월 26일에 기초자치단체인 시·군·자치구의회 의원선거를 실시하고, 6월 20일에 광역자치단체인 시·도의회 의원선거를 각각 실시하였다. 비록 단체장 선거는 미뤄진 반쪽의 자치였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중단된 이래 실로 30여 년 만에 지방의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제14대 대선에는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 민주당 김대중 후보,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신정당 박찬종 후보, 대한정의당 이병호 후보, 무소속의 김옥선 후보와 백기완 후보가 출마하였다. 선거 결과 전국 득표율 42.0%를 획득한 김영삼 후보가 각각 33.8%와 16.3%를 획득한 김대중 후보와 정주영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큰 쟁점이 없는 이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는 ‘색깔론’과 ‘금권선거’를 정치쟁점화하고, 거대한 유권자를 보유한 부산·경남·대구·경북 등 영남지역에서 63~74%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를 4백 여 만표 이상 따돌려 대승을 거두었다. 전국 투표율 81.9%에 비해 약간 낮은 80.6%의 투표율의 여주 선거 결과는 김영삼 후보가 36.9%, 김대중 후보가 24.8%, 정주영 후보가 29.5%의 지지를 받았다. 특이한 점은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의 지지는 전국 평균에 비해 낮은 반면에 정주영 후보에게는 13.2% 이상 높은 지지를 보냈다. 1993년 2월 25일 취임한 김영삼 정권의 등장은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31년간의 군부정권 시대가 막을 내리고 순수 민간정부가 들어섬으로써 문민정부의 개막을 알리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김영삼 정권 기간 동안 1995년 6월 27일 전국에서 일제히 4대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5·16 정변으로 중단된 지 34년 만에 지방자치가 전면 부활한 것이다. 지방자치단체는 집권여당인 민자당이 각급 단체장과 지방의원의 3분의 1 정도밖에 확보하지 못했으며, 야당인 민주당과 자민련이 여당의 2배 이상의 당선자를 배출하였다. 그리고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제15대 총선의 투표율은 63.9%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1997년 12월 18일에는 제15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제15대 대선에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 공화당 허경영 후보, 바른나라정치연합 김한식 후보, 통일한국당 신정일 후보가 출마하였다. 제15대 대선의 투표율은 80.7%로 역대 대선의 투표율과 비교할 때 비교적 낮았다. 선거 결과 김대중 후보가 40.3%를 득표함으로써 38.7%를 획득한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투표성향은 여전히 지역구도가 큰 변수로 작용하여 ‘서 김대중, 동 이회창’라는 성향을 보였으며, 이에 못지않게 연령·성별로도 지지성향이나 투표행태가 크게 달랐던 것으로 나타났다.

여주의 투표율은 전국 평균보다 낮은 78.7%였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전국적 경향과 전혀 반대로 나타났다. 전국 규모의 투표결과는 김대중(40.3%), 이회창(38.7%), 이인제(19.2%) 후보의 순서로 득표하였지만, 여주에서는 이인제(41.1%), 이회창(29.7%), 김대중(27.4%) 후보의 순서로 득표하였다. 즉 이인제 후보가 김대중,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는 제14대 대선 당시 전국적 경향과는 달리 정주영 후보가 김대중 후보보다 더 많은 득표를 한 경험과 함께 대통령 선거에서 여주의 특이한 성향을 보여준다.

김대중 당선자는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상대로 한 첫 대선출마에 이어 1987년 제13대,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잇달아 낙선한 뒤 네 번째 대권에 도전하여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정변이 아닌 정상적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50년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는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이제 하나의 장을 접고 새로운 장정에 오른 것이며, 우리 정치에 본격적인 책임정치를 실현하는 역사적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1세기 첫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2002년 12월 19일 실시되었다. 제16대 대선의 특징은 세대 간 대결이 지역주의에 맞설 정도로 위력을 떨쳤다는 점이다. 또 호남과 대구·경북지역에서는 지역주의가 여전히 맹위를 발휘했으나, 부산·경남·충청지역 등에서는 다소 완화되는 현상을 보였다. 또한 제16대 대선을 세대 간의 대결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당정치에서 시민정치로의 정치문화 변동, 미디어 선거 시대의 본격화 등 새로운 양상들이 많이 나타났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 하나로국민연합 이한동, 민주노동당 권영길, 사회당 김영규, 호국당 김길수 등 6명의 후보자가 출마한 제16대 대선은 70.2%로 사상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선거결과는 노무현 후보가 48.9%를 득표하여 46.6%를 득표한 이회창 후보를 앞질러 당선되었다. 이는 투표율이 낮아지면 보수 성향의 후보에게 유리하다는 과거 투표행태에 대한 고정관념도 깨진 것이다. 노무현 후보의 득표율은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얻은 53.2% 이후 40여 년만의 최고 기록이다. 여주의 투표율은 더욱 낮은 67.5%에 불과했다. 개별 후보자들의 득표내용을 살펴보면 이회창 후보가 49.4%, 노무현 후보가 44.4%로 전국 득표율과는 다른 지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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