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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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여강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옛 문헌에는 오대산 우통수(于筒水)를 남한강 발원지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남한강은 태백시 금대산 검용소(儉龍沼)에서 발원한다는 설이 요즈음의 정설이다. 검용소에서 출발하여 실낱같은 개울로 이어져 내려오던 남한강 원류는 정선에 이르러 조양강(朝陽江)이 되고 동강(東江)이 되었다가 영월에서 금장강(金障江)과 합류한다. 단양에서 황강(黃江)을 이루고 충주에서 달천(達川)과 합쳐진 물은 부론에서 섬강(蟾江)을 받아들인 뒤 여주에서 여강(驪江)이 된다. 배가 중요한 운송수단이었을 당시 여주는 내륙과 해산의 물류가 오고가는 주요도시였다. 물류를 운반하는 황포돛배가 언제부터 여강을 운항하였는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고려 정종(靖宗, 재위 1035~1046) 때 조운제(漕運制)가 시행되어 충주 덕흥창(德興倉)과 원주 흥원창(興原倉)등 전국에 12개의 창을 세우고 쌀을 운반하는 배를 20여 척씩 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를 전후하여 돛배가 운행되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남한강은 배가 다니기에 적당치 않았다. 곳곳에 여울이 있어 배의 통행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사(流沙)현상이 심한 여울에 뱃골을 텃는데 이는 비록 임시방편이기는 하나 홍수가 잦은 하천에서는 적절한 수로 관리방법의 하나였다. 뱃골은 보통 폭 10~15m, 깊이 약 3m 정도로 팠으며 작업도구는 가래와 같은 농기구가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여주에는 이포와 양화에 수참(水站)이 설치되고 각각 수부 30명과 참선 15척이 배속되어 있어서 뱃골을 파는 작업을 담당했다. 여울과 여울 사이에는 수백m에서 수천m에 이르는 풀(POOL)이 발달되어 배가 돛을 올리고 순항할 수 있었다. 이처럼 풀을 이루고 있는 수로는 유속이 느리고 폭이 넓으며 수심이 깊고 잔잔하여 호(湖), 연(淵), 담(潭), 소(沼)등으로 불렸는데 여주의 이호(梨湖)가 유명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용산에서 출발한 배는 4일에 이포, 5일 여주, 7일이면 충주에 도착했다고 한다. 배는 대선, 중선, 소선으로 구분되며 대선은 길이가 20~30m, 폭 10m 내외, 높이 2.5~3m 였고, 최대 500석의 쌀을 실을 수 있었다. 배는 두꺼운 송판을 끼워 맞추어 만들었으며 못을 적게 써서 약해 보였으나 나무가 물에 불으면 이음새가 꼭 맞아 튼튼하였다. 뱃머리는 둥글게 하고 고물과 옆에 긴 노를 달았다. 노의 손잡이는 7~8m나 되므로 두 명이 동시에 저을 수도 있었다. 돛대는 소나무기둥으로 세우고 헝겊 돛을 걸었다. 배의 앞부분에 화물칸을 두고 그 위에 마루를 깔아 짐을 실을 수 있게 하였다. 갑판의 화물이 젖지 않도록 풀로 짠 ‘뜸’을 덮었다. 배의 뒤쪽에 가옥 형태의 구조물을 지어 비바람을 피하였고 뱃전은 띠풀로 싸서 충격시 파선을 방지하였다. 화물을 가득 실은 배는 약 2m 가량 물에 잠기므로 수면에서 갑판까지의 높이는 1m가 못되었다. 따라서 비록 바다처럼 파도가 없을 지라도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운행에 조심해야 했었다. 1920년대 여주와 이포에서 1일 평균 1,000석의 쌀이 서울로 출하되었다고 한다. 당시 여주와 이포의 출하물은 쌀과 곡물이었고 입하물은 소금, 건어, 잡화 등이었다. 여강의 선박통행량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나루터가 발달되고 객주(客主)가 등장하였다. 1869년에 간행된 『여주목읍지』와1899년에 간행된 『여주읍지』에 의하면 여강에는 흔암진(欣巖津), 단암진(丹巖津), 양소진(陽沼津), 여주진(驪州津), 어량진(漁梁津), 양화진(楊花津), 이포진(梨浦津), 구미포진(龜尾浦津) 등이 있었다고 한다. 객주는 화물의 위탁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물상객주(物商客主)와 창고와 마방을 갖추고 미곡, 어물등 부피가 큰 품목을 취급하는 여각(旅閣)으로 구분되며 여주와 이포에는 10~20호의 객주가 있어 호황을 누리기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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