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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양반과 평민의 우정

정시응(鄭時膺)은 일찍이 감사를 지낸 문익(文翼)의 서자였다. 아이 적에 사납고 횡포가 심하므로 항상 마을에서 골칫거리로 여기는 존재였다. 그 아버지가 여러 번 매를 때렸으나 끝내 고쳐지지 않고 더욱 사나워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하였다. 그 아버지도 제어할 수 없어 그대로 두고 다시는 단속하지 않았다.

이웃에 사는 어떤 평민의 아들이 시응과 함께 친하게 지냈는데 때로 시응과 다투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응이 귀한 집 아들이어서 감히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겨루지 못하고 며칠을 피하다가 새나 꽃 같은 것을 가지고 시응의 비위를 맞추어 다시 잘 지내기를 청한 다음 호젓한 곳으로 유인해서 통쾌하게 때려주었다. 자주 이렇게 하곤 했는데 시응은 항상 그에게 속았다.

뒤에 시응은 장성하여 옛 버릇을 과감히 고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 무과에 합격하였다. 생김새와 체격이 웅장하고 지략이 풍부하여 주먹심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뛰어서 들판에 달리는 노루를 쫓고 맨주먹으로 야생마를 때려잡을 만큼 날랬다.

이때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시기라 군의 추천으로 용천부사(龍川府使)가 되고 또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었다.

뒤에 그는 벼슬을 내놓고 집에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그를 다시 쓰지 아니하였다. 그는 매일 활을 휴대하고 배를 타고 가 동호(東湖)에서 기러기를 잡으며 시간을 보냈다.

청성부원군(淸城府阮君) 김공(金公 : 鍚冑)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 그를 맞이하려 하였지만 시응은 남인이라 서인의 초청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공도 찾아가는 것을 꺼려했다.

김공이 언젠가 한강 정사(漢江 亭舍)를 지나다가 시응의 배를 발견하고 기수(旗手)를 시켜서 그를 물가로 맞아오게 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소인이 어떻게 기러기를 잡으라고 불러냅니까? 조금만 늦으면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것을 말리지 못할 것이오.”

그가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에 또 요청하였으나 그는 또 핑계를 댔다.

그러면서 끝내 김공을 만나보지 아니하였다.

1680년(숙종 6)에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득세한 사건이 일어나자 시응은 다시 세력을 잃고 발붙일 데가 없었으며 집이 가난해졌다.

통수(統帥 : 使) 중에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편지로 시응을 맞이하였다.

“막비(幕裨)는 그대가 반드시 싫어할 것이니, 만일 손님으로 내게 오면 도와주겠네.”

시응은 못난 종 한 명과 야윈 말 한 필로 초라하게 길을 떠났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어렵게 진주 지방에 이르니, 길가에 큰 마을이 있었다. 이때 해는 저물어가고 말은 지쳐 객점까지 갈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유숙하고 싶었으나 마음이 내키지 않아 주저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한 사람이 나타나서 말 머리에 대고 절을 하는 것이었다.

“주인님께서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길은 아직도 먼데 어떻게 가실 수 있겠습니까? 제 집이 비록 누추하나 종과 말을 수용하기에 충분하니, 원컨대 왕림해 주소서.’라고 이르십니다.”

시응은 의아하였으나 처지가 난감함을 생각하여 일단 그 말에 따랐다. 말고삐를 당겨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 안에 당도하자 무척 큰 장원(莊院)이 보였다. 대문을 들어서니 넓은 뜰과 웅장한 집채가 마치 큰 관부(官府)와도 같았다. 주인은 수염이 반쯤 희고 용모가 헌걸스러웠는데 엄숙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 시응은 속으로 ‘진주에는 옛날부터 호부(豪富)가 많기로 일컬어졌는데, 과연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자네는 나를 알아보겠는가?”

시응은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안면은 본 듯도 한데… 그렇지만 어찌 당신과 만난 적이 있겠습니까?”

“나는 바로 이진에 살던 이웃집 아들일세.”

시응은 깜짝 놀랐다.

“자네가 어찌 여기에 있지? 또 어떻게 이처럼 훌륭히 되었지?”

시응이 놀라며 묻자 주인은 태연히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는 관찰사의 아들에다 뛰어난 지용(智勇)과 무예(武藝)까지 겸하였는데도 다만 일개 이름이 있는 연유(서자)로 겨우 용천부사를 하는 데 불과하고 백수로 굶주린 채 백리 밖까지 다니며 걸식을 하는데, 하물며 나는 평민의 자식이거늘 장차 어떻게 이 세상에 쓰이겠는가? 만사 쾌활은 환포(도적의 근거지)의 생애에 자나지 않을 뿐이네.”

그리고 이어서 자기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나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남의 품팔이꾼이 되었지. 일신은 의탁할 데 없고 생활은 계책이 없어서 비로소 몹쓸 생각을 하고 처음 소규모의 도당(盜黨)에 뛰어드니 그 무리가 10여 명 밖에 안 되었는데 재주와 지혜가 모두 나만 못하므로 나를 괴수로 추대하더군. 이 10여 명의 무리를 가지고 큰 도당에 들어가니 그 무리 수백 명이 또 모두 나만 못하므로 역시 나를 장수로 추대하더군. 점점 수를 늘리고 또 다른 도당을 합치니, 인원이 더욱 많아졌는데 또한 모두가 나만 못하므로 나를 대장으로 삼더군. 이런 식으로 하여 한 도내의 도당을 모두 합하고 또 세력이 다른 도까지 뻗어가서 모두들 나의 지휘를 받으니 지금 팔도의 녹림호객(綠林豪客)이 다 나의 부하일세. 자네, 나의 군적(軍籍)을 한번 보게나.”

그리고는 이내 다락에서 군적을 꺼내다가 보이는 것이었다. 크게 엮어 쇠로 장책한 것이 대여섯 개나 되었는데 거기에 쓰인 사람이 무려 10여만 명이나 되었다.

시응은 더욱 놀라며 물었다.

“이 같이 많은 사람으로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주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만일 국가가 남정북벌(南征北伐)을 한다면 나는 어렵지 않게 이들을 거느리고 앞장을 설 터인데, 지금 쓸 데가 없으니 단지 못된 일만 할 뿐일세. 수십 년 전부터 이미 여기에 숨어사는데 문 밖에 나가지 않고 일은 모두 각부(各部)의 장령들에게 위임하고 다만 외방 노비의 신공(身貢)을 거둔다고 핑계하고 매년 재물이나 거두어올 뿐, 시장을 열고 물건을 매매하거나 으슥한 길을 다니며 나의 집을 넘보거나 하는 일까지도 역시 상관하지 않고, 오직 급한 일만 와서 보고하게 하네. 저 팔도 영읍(營邑)의 권세를 부리는 교활한 아전이나 경성 좌우 포도청의 일을 맡을 건장한 장교는 내가 다 포섭해놓았지. 수시로 인사를 치르고 명절 때마다 선물을 보내서 깊이 그들의 환심을 얻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부탁해서 해결한다네. 지금 세상에 천금을 써서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무리 큰 사건이라 하더라도 해결 못할 것이 없으니 별 일이 없네.

지금 나의 전원과 피택(陂澤)이 이웃 고을에까지 펼쳐 있고, 정사(亭舍)와 종고(鐘鼓)는 공후(公侯)에 견줄 만하며, 남녀 혼인은 모두 사족(士族)들과 하였고 자손들도 다 글을 읽어 선비가 되었네. 그리고 나는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서책만을 대하고 있으니 이 나라 사람들은 도리어 나를 이학선생(理學先生)이라 부른다네. 자네는 나의 하는 짓을 볼 때에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응은 다 듣고 나서 크게 혀를 찼다.

“자네는 참으로 영웅일세. 보통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닐세.”

주인은 이내 시응을 며칠 동안 머물게 하면서 말했다.

“자네의 이번 걸음에 대해서는 내 오래 전에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네. 통수가 자네를 도와주는 것은 반드시 한 번에 불과하리니 어찌 족히 도움이 되겠는가? 내가 자네를 도와줄 것이니 멀리 더 갈 필요 없네. 여기에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네.”

그리고는 곧 하인을 불러서 일렀다.

“정용천 영공(鄭龍川 令公)은 바로 소싯적 친군데, 이처럼 가난하니 어찌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열 필의 말에 은전과 포백(布帛)을 가득 실어라. 다 싣고 나서 나에게 알리라.”

얼마 후에 하인이 들어와서 다 준비되었다고 알렸다. 시응은 부득이 그것을 받아 돌아왔으며, 감히 남들에게 말하지 않고 통제사의 도움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설화문학총서』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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