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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과 적괴의 형제

이완이 청년시절 산으로 사냥을 가서 사슴을 쫓아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그만 해가 떨어진 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마음이 몹시 다급해졌다. 돌아갈 길을 찾아 구렁텅이를 거쳐 산이 갈라진 곳에 이르니 희미하게 나무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차츰 앞으로 가니 주문갑제(朱門甲第 : 권세 높은 벼슬아치의 우람한 집) 비슷한 큰 기와집 한 채가 보였다. 그 집 대문을 두드렸으나 반응이 없었다. 잠시 후에 한 여자가 치마를 살짝 걷고 문에 기대서서 말하였다.

“여기는 손님이 잠시도 머무를 곳이 아니니 속히 가십시오.”

이완이 그 여자를 보니, 나이는 스물 남짓한데 꽤 미색이었다.

“산은 높고 골은 깊으며 게다가 또 날은 어두워서 맹수는 횡행하고 인가는 아득한데 어찌 한 귀퉁이 용접(容接)할 곳이 없어서 이처럼 거절하는 거요?”

“여기 있으면 죽습니다. 일석지(一席地)를 아끼려는 것이 아니고 천금 같은 몸을 버릴까 염려되어서입니다.”

“문 밖에서 맹수에게 죽느니 차라리 향분지옥(香粉地獄)에서 죽겠소.”

이완은 드디어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여자는 막을 수 없음을 알고 방으로 맞아들였다. 촛불을 켜고 마주 앉은 후에 이완이 영문을 물으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기는 도적의 소굴입니다. 저는 양가의 딸로서 도적에게 잡혀 여기에 온 지 여러 해인데 자결하려고 해도 할 수 없어 지금까지 구차하게 살고 있습니다. 비록 기라(綺羅)와 주취(珠翠) 속에서 살고 있다 해도 감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제 소원은 바른 마음 가진 사람을 만나서 이 감옥을 탈출하게 되면 종신토록 받들어 모실 생각이건만 하늘이 소원을 따라주지 않아서 그럭저럭 오늘날까지 살고 있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도적은 어디 있소?”

“마침 사냥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밤이 깊으면 반드시 올 것이니 손님이 여기에 계신 것을 발견하면 저와 손님은 그의 칼에 머리를 내주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죄 없이 죽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손님은 뉘 집 귀공자이신지 모르겠으나 맹수의 굴에 들어와서 맹수에게 물리면 어찌 공연한 죽음이 아니겠습니까? 속히 피하시어 스스로 슬픔을 남기지 마십시오.”

“죽을 시간이 임박하였더라도 허기를 못 참겠으니 속히 밥을 준비해 오시오.”

그녀는 곧 부엌으로 가서 밥을 지어 오니, 산채와 야채와 곰구이와 돼지구이 등으로 걸게 차려졌다. 그녀는 또 술을 따라 권하였다. 이완은 이미 술을 취하게 마시고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녀는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러시다 후환을 어찌하시렵니까?”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차피 모면하지 못할 것이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밤에 남녀가 한 방에 같이 있는데 어찌 혐의를 면할 수 있겠소? 비록 사실이 없다 하더라도 누가 믿겠소?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겁낸다고 무엇이 보태지겠소?”

이완은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만지며 벌떡 누워 태연하게 있었다.

조금 후에 뜰에서 ‘탁탁’ 하고 물건을 던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갑자기 벌벌 떨며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적괴(賊魁)가 왔네요. 어찌 합니까?”

이완은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가만히 문 밖을 살펴보니 사슴과 산돼지가 뜰에 그들먹하였다. 이윽고 건장한 사내 하나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신장은 8척이고 얼굴은 사납게 생겼는데 손에는 장검(長劍)을 들고 낯빛은 약간 취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누워 있는 이완을 보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는 어떤 놈인데 감히 이곳을 왔느냐?”

이완이 태연하게 말했다.

“짐승을 쫓아 산에 들어왔다가 날이 어두워져서 여기에 왔느니라.”

적괴는 또 성내며 꾸짖었다.

“너는 담이 말(斗)만큼이라도 되느냐? 어찌 그렇게도 대담하냐? 기숙하려면 바깥사랑에 있을 것이지 감히 내실에 들어 유부녀를 간범(奸犯)하였으니 이미 죽을죄를 지었거니와 또 너는 손님으로서 주인을 보고도 예의를 차리지 않고 벌떡 누워서 쳐다보니 이 무슨 도리냐?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이완은 웃으며 말했다.

“깊은 밤에 남녀가 한 자리에 붙어 앉아 있는데 비록 깨끗한 마음이라 한들 너는 믿겠느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반드시 한 번 죽게 마련인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네가 하는 대로 맡겨두겠다.”

적괴는 이에 큰 새끼줄로 이완을 묶어서 들보 위에 달아매고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문 밖에 사냥해 온 짐승들이 있으니 깨끗이 씻어서 삶아오너라.”

그녀는 벌벌 떨며 밖에 나가서 노루와 사슴의 털과 창자를 제거하고 솥에 넣어 무르도록 익혀가지고 큰 소반에 차려서 들여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고기는 연하여 썰기 쉬웠다. 적괴는 또 술을 가져오게 해서 큰 사발로 한 동이를 다 기울이고 허리에서 서슬이 시퍼런 칼을 뽑아서 고기를 썰어 먹으면서,

“어찌 사람을 곁에 두고 혼자 먹을 수 있겠느냐? 너는 곧 죽을 놈이지만 맛을 알게 해주마” 하고 칼끝에 꽂힌 사슴고기 한 덩어리를 주었다. 고깃덩이를 받아 삼키되 조금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적괴는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말했다.

“장사로구나.”

이완이 화를 냈다.

“네가 나를 죽이려거든 얼른 죽일 것이지 어찌 놀리느냐? 옛날 항우(項羽)가 번쾌(樊噲)를 장사라고 칭찬하였는데 너는 이 말을 써서 자신은 초패왕(楚霸王 : 항우를 높여 부름)에 비유하고 나는 푸줏간에서 칼이나 두드리는 무리로 낮추느냐?”

적괴는 크게 웃으며 칼을 던지고 일어나서 이완의 결박을 풀고 손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당신 같은 천하의 기남자(奇男子)를 이제야 처음으로 보게 되었구려. 장차 세상에 크게 쓰여 나라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데 내가 어떻게 죽일 수 있겠소? 나는 몇 마디 말을 듣는 순간에 이미 지기지우(知己之友)로 허락하였소. 저 여자는 비록 내 아내이기는 하지만 본래 결혼한 아내가 아니며 그대가 한밤중 동안 사랑하였으니 이미 정이 통한 것이오. 지금부터는 그대에게 붙여 시중을 들게 하고 또 창고 속에 있는 재물을 모두 당신이 쓰게 하겠소. 장부가 세상에서 일을 하려면 수중에 돈이 없어서야 어떻게 하겠소? 굳이 사양하지 마시오. 나는 여기에서 떠날 것이오.”

적괴는 또 술 한 동이를 가져오게 하여 대작하며 형제의 의를 맺었다.

“후일에 나는 반드시 큰 액이 있어 목숨이 당신 손에 달릴 것이니 이날의 정을 잊지 말아주기 바라오.”

말을 마치자 적괴는 훌쩍 떠났는데 어디로 향하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완은 곧 마구에 있는 말을 끌어내어 여자를 태우고 재물을 실어가지고 돌아왔다.

그 뒤 이완이 현달하여 훈련대장으로 포도대장을 겸하고 있을 때 지방에서 큰 적괴 한 명을 잡아 올렸다. 조사하려 할 적에 그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산중에서 만났던 적괴였다. 이완은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곧 지난 일을 임금에게 자세히 아뢰어 너그럽게 용서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는 석방시켜 장교의 대열에 배속시켰다. 그 자가 용력과 재간을 갖추어 직무를 잘 수행하므로 이완은 깊이 신임하였다. 그는 뒤에 무과에 오른 다음 차례로 승진하여 곤수(閫帥 : 兵使·水使)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동야휘집』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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