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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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덕곡의 전설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더불어 여강을 즐겨 찾은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시에 이르기를 “산수가 스스로 맑고 기이하여 높은 관개가 서로 만나니 기약이 있는 듯 하네(黃驪山水自淸奇 冠蓋相逢若有期). 별당의 거문고와 노랫소리는 자리가 질서있고 긴 강의 구름과 달은 밤이 더디네(別院絃歌筵秩秩 長江雲月夜遲遲). 배를 띄우니 아득하게 은하수와 통하듯 날리는 눈은 부슬부슬 술잔에 떨어지네(浮樹縹緲通霄漢 飛雪霏微落酒扈). 다행히 여러분 모시고 성한 모임 가지니 풍류와 문채가 당시에 제일일세(辛與藷公陪成集 風流文彩勝當時).” 이렇듯 여강에 배 띄우고 시를 읊조린 정황을 기록한 양촌 권근의 연집서(宴集序) 중 이런 대목이 있다.

금상(恭讓王)께서 즉위하신 지 3년 신미(辛未)년(1391년) 11월에 우리 좌주(座主) 한산(漢山) 목은(牧隱) 선생께서 은명(恩命)을 받아 서울로 조공(朝貢)하러 들어가는 길에 여강 별장에 이르렀는데, 이때 모시고 앉았던 사람은 침서 종학(種學)이니 선생의 아들이고, 여흥 군수 권총(權總)은 생질이요, 근(近)과 도사(都事) 이우(李愚)는 모두 문인이다.

여강(驪江)의 산수가 좋음은 자고로 일러오지만 사람의 일은 많이 뜻과 어긋나고 좋은 벗도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운데 우리들이 서로 떠돌아다니던 끝에 이 회합을 만났으니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다.

한자리의 손의 명망이 높음은 한산(漢山) 같고, 위험한 무거움이 안공(安公) 같고, 문아(文雅)함이 도재(陶齋) 같고, 현달한 명사들이 제공과 같은 이들이 서로 같이 한배를 타고 노는 것도 또한 몇 번이나 있었는지 이 강이 있은 이래로 이제 겨우 있는 일이다.

산굽이를 에워싸며 마치 승천하는 용이 용트림하듯 줄기차게 흐르는 청미천 줄기를 장려한 오압산 국수봉을 마주 건너다 보며 봉이 드높게 솟은 강금산 마루에서 빤히 건너다 보이는 수리산봉 아래 양촌 권근 문충공(文忠公)의 묘가 자룡고모형 상운안 용이혈(子龍顧母刑 祥雲案 龍耳穴)로 명당인 곳에 자리해 있다. 또한 드높은 강금산 기슭에 태종의 부마인 길천군(吉川君)과 태종의 삼녀 경안궁주(慶安宮主)의 분묘가 가지런한데, 이곳의 권규(權硅)가 바로 양촌 권근의 삼남이다.

강금산 낙맥이 뻗어내리다 봉이 솟은 남쪽 양지 바른 원부리에 마치 부모님 품 안에 답쑥 안기기라도 한듯 규(跬)의 아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길창군(吉昌君) 총(聰)의 분영이 있기도 하니, 청계천 줄기 변방에 자리한 산들이 대명산(大名山)일 수밖에 없다.

점동면의 주산인 강금산은 세종대왕릉을 천장하고자 할 때 호조판서 노사신(盧思愼)과 예조판서 임원준(任元濬), 한성부윤 서거정(徐居正)등이 상지관(相地官) 안효례 등을 거느리고 길흉을 진달(陣達)차 답산한 이 산기슭에 560여 년 전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길천군 묘를 천장하느라고 산역준비로 사람들이 한창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면을 한바퀴 둘러보아도 산세의 생김이 같은 모양새라고 하는 강금산의 양지 바른 동남쪽엔 오목조목 작은 봉과 계곡이 많다. 한참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노승과 동자승이 나타나 광중을 파는 데로 다가서더니 “물이 나온다 물이 나와.”하며 머리를 긁적거린다.

이때 산역을 지휘하던 관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사람을 부른다. 광중이 물 한 방울 안 비치는데 물이 나온다니 쓸데없는 허튼 소리를 하는 동자승을 포박하라고 명을 내리니 동자승은 금방 포박당하고 말았다. 얼마 후 시간이 흘렀는데 그렇게 뽀송뽀송하던 광중 안에 샘이 솟더니 이내 광중 바닥에 물이 괴고 말았다.

관헌과 산역군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기색이다. 그때 어느 관헌이 동자승의 포박을 풀어주며 겸손하게 예를 올리고 좋은 묘안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동자승이 미소 띤 얼굴로 노승을 바라본다. 노승이 고개를 끄덕이니 동자승이 손가락으로 한 골짝을 가리키며 그곳에다 우물을 파라고 일러주어 우물을 파니 참으로 신기하게 광중 안의 물이 잦아들고, 나던 샘이 그쳤다.

동자승이 노승을 가리키며 덕망이 높으신 노승의 귀한 말을 듣고 장례를 모시라고 하니 노승 주위로 관헌과 지관이 모여섰다.

노승이 혼자 산계곡의 이름을 지어 나간다. 기시미골, 부처골, 긴골, 움물골, 평바위골, 재피골, 장자골… 혼잣말로 산이 골형제가 많군 하더니 무쇠 삿갓을 쓴 사람이 지나가면 그때가 하관시라고 일러준다.

청명하던 하늘에 금새 먹구름이 몰려와 이내 하늘은 때 아닌 소나기를 퍼붓는다. 바로 그 무렵 밥 짓는 데서 일을 보던 어느 할머니가 비를 피하느라고 무쇠솥 뚜껑을 머리에 쓰고 비를 피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때를 맞춰 하관을 서둘러 장례를 모신 후 노승과 동자승을 찾으니 이미 어디론가 가버린 후였다. 동자승과 노승이 일러준 대로 장례를 모신 후 후손들은 더 많이 관직에 올랐으며 권(權) 부마의 사패지표석(賜牌地表石)이 아직도 남은 강금산 계곡마다 그때 노승이 좋은 이름을 붙여주어 동리가 태평했다고 하는데, 덕망 높은 노승이 계곡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하여 이 동리를 사람들은 덕곡(德谷)이라 불러오다가 그 이름이 지금에 와서 덕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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