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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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요령과 귀래동의 전설

하늘로 곱게 떠가는 잿빛구름이 금방 강물에 듯한 찬우물 옛 나루터는 그 지세의 흐름이 평양과 흡사하다. 흥천면 상백리에 소재한 이곳의 경관은 멀리 안개 속에 휩싸인 원적산(圓寂山)이 서쪽에 자리잡고, 북쪽으로 을씨년스런 용문산(龍門山)과 추읍산 줄기에 파사산성(婆娑山城)이 장려하며 동으로 우두산(牛頭山)이 병풍처럼 드리웠다.

싸리산 기슭으로 흘러온 여강을 따라 마치 더 내려오다 걸린 듯 싶은 산이 능라도와 비견할 수 있다는 양촌(揚村)벌에 덩실하니, 외롭게 솟아 있어 산 이름조차 고산(孤山)이란다.

강언덕 벼랑을 깎아지른 듯한 운치 있는 산봉이 모란꽃 봉오리 같다 하여 모란봉[牡丹蜂]인데 이 산세가 마치 평양의 모란봉과 흡사한 곳으로 이름 나 있다.

산봉에서 굽어보면 아득히 굽이치며 흘러가는 여강의 경관이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절경으로 백운거사 이규보는 이 강안을 시로 읊조리길 “계수나무 노와 목단배로 푸른 물결을 가로지르니 붉은 단장이 물 가운데의 하늘에 아름답게 비치네. 소반에 차린 것은 배꼽 둥근 계만보겠고 그물을 거니 도리어 목 움추린 편을 보겠네. 10리의 연화는 참으로 그림 같은데 여강에 풍월은 돈을 논하지 아니하네. 모래에 앉은 갈매기야 고기잡이 노래 소리를 익숙하게 들었을 터이니 날아와 여울 앞에 이르러 배를 피하지 마라 하였다.

모란봉 남서쪽 건너 보이는 곳에 기관산(箕觀山)이 있는데 기자조선 때 왕이 이곳까지 행차하여 이 산을 바라보았다 해서 기관산이라고 부르는데, 이 산 낙맥에 신근사리산이 있고 바로 찬우물 나루터 가는 길목이며, 이곳에 한 분묘가 있다.

400여 년 전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 분묘 앞을 무장상(武將相)이 온몸에 만연된 피부병을 고치려고 찬우물 약수터를 찾아 타박타박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미처 신근사리 산자락에 있는 소류지 근처에 하마비가 있는 것을 못 보고 무심코 지나가다가 어인 일인지 그만 말발굽이 땅에 딱 붙어 꼼짝달싹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말에서 내려 여러 가지 방도를 강구해보았으나 모두 소용이 없고 도움을 청하려고 사면을 살펴봐도 어인 일인지 오가는 사람조차 눈에 띄지 않아 마음만 답답하고 초조할 뿐이다. 초조해진 무장상은 인근을 살펴보니 몽둥이를 할 만한 나무가 눈에 띄었다. 잽싸게 그 나무를 가져다가 말발굽이 땅에서 떨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몽둥이로 말발굽을 천천히 때려보았지만 말은 여전히 꼼짝달싹하질 않는 것이다.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비지땀이 흐르고 애가 타던 마음은 이제 약이 올랐다. 이번엔 있는 힘을 다해 말발굽을 세차게 후려쳤다. 이때 피식 하고 말이 쓰러졌는데 그만 다리가 부러져 말은 이내 죽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죽은 말을 버리고 몇 발짝 무장상이 거닐어가는데 해괴하게 이번엔 무장상의 발길이 움직여지질 않는 것이 아닌가? 한참 애를 쓰다가 말이 있는 쪽으로 발을 옮기니 겨우 발걸음이 떨어진다. 그제서야 필시 이곳에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때 두리번거리며 사면을 살펴보니 저만치 산 언덕에 있는 분묘가 눈에 띄었다.

저 분묘에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부러진 말발굽을 집어다 혼유석에 문지르고 산제사 드리듯 수십 번 절을 하였다.

그리고 조심조심 뒷걸음쳐 발길을 옮겨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서니 그때서야 찾아가던 길을 갈 수가 있었는데 이곳의 분묘는 다름 아닌 예조참판을 지낸 조선왕조 중기의 충신 김주(金澍)의 묘소인데 여기에는 이런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김주는 조선시대 왕실의 세보인 원계보(源系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明)의 연경을 부사 자격으로 갔었다.

명(明)의 교관들이 주연에 초대해주어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앳된 기녀가 있었는데 우리 동족이었다.

김주는 명에까지 와서 기녀가 된 사유를 물었다. 부친을 따라 명까지 왔다가 부친이 별안간 타국에서 객사하는 바람에 시신을 고국으로 모셔갈 돈이 없어 하는 수 없이 기녀가 되었다는 딱한 사정을 듣고 난 김주는 그 기녀에게 도움이 갈 만큼 동족애로서 도와주었다. 바로 그 기녀가 명의 예부시랑(禮部侍郞)의 애첩이 되었다. 그런 연유로 어려운 문제들을 예부시랑이 황제에게 잘 진언하여 명에 사신으로 갔던 사명을 완수하게 되었는데 귀국길에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책임자로 갔던 정사가 김주의 공적을 시기하여 어이없게도 이국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한다.

그 후 명에서 시신을 모셔올 때 요여에 혼백을 모셔 오는데 돌아간 분이 생시처럼 자손들에게 꿈에 나타나 길을 잘 인도하라고 하여 자손들이 숙의 끝에 맨 앞에서 작은 종을 흔들며 정중히 모셔가기로 하였는데, 이상하게도 요여에서 다 왔느냐 하는 소리가 나 요령을 흔들면 그 소리가 잠잠해지고 수천리 길을 나던 소리가 이천 넋고개에서 뚝 그쳤다. 그때부터 상여가 나갈 때면 요령(搖鈴)을 치는 관습이 생겨났으며 김주가 살던 동리로 혼백과 시신을 모셔왔다 하여 오늘의 귀백리(歸白里)가 옛날 백양동(白洋洞)과 귀래동(歸來洞)인데 그 후 귀래동(歸來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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