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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원, 박종경 이야기

박준원(朴準源)은 자가 평숙(平叔)이며, 호는 금석(錦石)으로 본은 반남(潘南)이다. 1786년(정조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음보(陰補)로 주부(主簿)가 되고, 이듬해 딸이 후궁으로 들어가 수빈(綏嬪)이 되자 건원릉 참봉을 거쳐 공조좌랑에 올랐다가 공조·형조판사, 어영대장, 금위대장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가 여주 가업리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어느 해 수해가 나서 전지(田地)가 모두 없어져버렸다. 할 수 없이 식구들을 데리고 그의 서울에 사는 육촌 박명원(朴明源)을 찾아가서 의지하게 되었다. 박명원은 영조의 딸 화평옹주(和平翁主)와 결혼,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졌고, 품계는 수록대부(綬祿大夫)에 이르렀으며, 그의 자는 회보(晦甫), 호는 만보정(晩褓亭)이란 사람이다. 그때 정조대왕에게는 세자가 없었는데 후사를 이을 세자를 얻기 위해 당시 경기감사를 지내던 박명원의 사촌에게 딸이 있었으므로 후궁으로 삼으려고 했다.

정조가 영조의 손자이고 박명원은 영조의 사위이니까 박명원은 정조의 고모부가 된다.

그래서 박명원이 그의 사촌더러, “상감께서 자네 딸을 후궁으로 말씀하시니 자네 의향이 어떤가?” 의사를 물으니 “왜 내딸이 후궁감만 되오” 하고 반대하니 임금한테 가서 사촌이 반대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당장 큰 걱정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박준원이 식구들을 데리고 왔는데 박준원의 식구들 중에 딸이 있어 그때 19세로 그의 사촌인 경기감사의 딸보다 훨씬 예쁘게 생겼었다.

그래서 박준원에게, “여, 동생 자네더러 이런 소리를 하면 섭섭한 소리 같지만, 자네가 이렇게 궁하게 왔는데 이런 소리를 하면 ‘내가 궁하니까 이러는구나’ 오해를 할지 모르겠네. 다름이 아니라, 금상께서 내 사촌의 딸을 후궁으로 맞으려 하는데 그 사람이 말을 안 들어. 지금 자네 딸을 보니 사촌의 딸보다 훨씬 잘생겼어. 자네 딸을 금상의 후궁으로 보내는 것이 어떤가? 자네 의향대로 하게” 하였다.

박준원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 “그럼 그러시우” 하고 선뜻 대답했다.

그래서 박명원은 정조에게 아뢰기를, “경기감사의 딸보다 내 육촌의 딸이 더 나을 것 같으니 상감께서 친히 보시고 정하십시오” 하였다.

이렇게 해서 박준원의 딸을 보게 되었는데 경기감사의 딸도 정월 세배 때 보았지만, 박준원의 딸이 훨씬 나아서 박준원의 딸을 후궁으로 삼았다.

후궁이 된 후 곧 왕자를 낳았는데 이분이 순조이며, 곧 빈(綬嬪)으로 봉해졌다.

그런데 박준원에게 박종경(朴宗慶)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박종경의 자는 여회(汝會), 호는 돈암(敦巖)으로 순조의 외숙이 된다.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부수찬(副修撰)이 되고 이어서 교리(敎理), 홍문관제학(弘文館堤學)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냈다. 왕실 외척으로 세도가 당당하던 박종경은 그가 나들이할 때에는 그 행차가 하도 위엄하고 호화로우며 많은 수행자를 거느리고 다녀서 그가 종로에 나서면 종경(鍾景) 소리가 난다고 했으며 항간에는 다음과 같은 민요가 떠돌았다고 한다.

“박덩쿨아 박덩쿨아 성치마라, 잇집 지붕 다 썩는다.” 즉 박종경의 성이 박가이며, 박덩쿨이 자꾸 올라가면 초가집 지붕이 박덩쿨의 그늘에 가려 물이 잘 마르지 않으므로 쉬 썩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항간에서 이런 민요가 유행하므로 수빈이 자기 동생(박종경)에게 말하기를, “세상이란 남보다 우뚝하고 출중하면 적이 많이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이를 꺾으려고 덤비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너의 세도가 너무 커. 그러니 우리집 친정이 무사하려면 너무 세도를 부리지 말고 네가 조금 자숙을 해야 되겠.”고 충고를 할 정도로 그의 세도가 대단했다. 그런데 박종경에게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박종경이 어려서 글을 배울 때 여주 금사 이포리에서 배웠다고 한다. 그때 그와 동문수학하던 사람으로 이씨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벼슬을 못하고, 후에 서울로 가서 성문밖 변두리에 서당을 만들어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살던 집의 윗집에는 대궐에 다니는 군관이 살고 있었다. 윗집에서 어린애 대소변이나 오물을 버리면 이것이 이씨집 마당으로 흘러와 불결하고 악취가 지독할 뿐만 아니라 부인이 남의 집 빨래나 바느질로 근근히 살아가는 처지에 빨래가 바람에 날려 땅에 떨어지면 오물이 묻게 되어 다시 빨아야 되서 불편한 점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는 대궐에 다니는 군관인지라 말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고 있는데, 부인이 “여보, 당신과 젊어서 같이 수학하던 박대감이 있다면서 이런 소리도 가서 못 하느냐?”고 하니까 이씨는 박대감을 찾아갔다.

서로 술을 나누고 그간에 쌓였던 옛날 얘기를 나눈 후 헤어질 적에 “자네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나?” 하고 박종경이 물으므로 자기 윗집에서 오물을 버려서 불편했던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하였다. 이 말에 박종경은 “내가 아무리 벼슬은 하지만 그 사람은 상감을 모시는 군관이 아닌가? 그래 내가 그 사람한테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그런데 자네 집은 지금 어딘가? 며칠 후 자네 집에 구경좀 감세.”

며칠 후 박경종이 어마어마하게 행차를 차리고 이씨 집에 와서 놀다가 갔다.

박대감이 왔다 가는 것을 본 뒷집의 군관은 이거 안 되겠다 싶었던지 쌀과 나무를 갖다주면서 전과는 다르게 대했다.

그런데 이때 박종경은 전국의 부세를 관장하는 호조판서로 있었다. 당시는 일반조세 외에 각처의 특산물을 현물로 국가에 바쳐야만 했었다. 이렇게 각처에서 올라온 특산물을 박종경이 “아 이것 못 쓰겠다 다시 해 오너라” 하고 불합격으로 내치면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등 먼 곳에서 이런 것을 가져온 사람은 한마디로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이 이생원이 박대감과 친하다는 소문을 듣고 이생원을 찾아와서 어떻게 좀 통과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생원은 “이 사람은 나하고 어떻게 되는 사람인데 좀 봐달라”고 편지를 써주면 박종경은 이 편지를 보고 아무 말 없이 받아준다. 가지고 내려가서 다시 해오려면 비용도 많을 뿐만 아니라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이생원에게 돈을 듬뿍 주어 사례를 한다. 이런 식으로 하여 이씨는 많은 돈을 벌어서 막대한 전답을 사고 고래등 같은 집을 지어서 하인을 부리면서 잘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씨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은 모두 박대감의 덕이다. 그래서 하루는 통영갓에 명주두루마기를 입고 마른 신을 신고 박대감을 찾아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까, “자네 그 전과는 달라졌네. 그래 뭘 해서 돈을 벌었나?”

“이게 모두 대감 덕입니다.”

“아 내가 뭘 해줘서. 그러나저러나 내 농담이지만 자네 이제 문 안에 있지 말게, 그만치 했으면 좀 나가 있게.”

이렇게 해서 장단 유능참봉을 시켜보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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