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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의 전설

육가람(六伽藍) 신륵사(神勒寺)는 한강이 구비치는 봉미산 기슭 아늑한 숲에 감싸인 천년고찰이며 영릉(英陵)의 원찰(願刹)이기도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이 기문(記問)에 이르기를 여주는 국도의 상류지역에 있으며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라 칭하여 오는데 신륵사가 바로 이 형승(形勝)의 중앙에 있다.

옛날 현릉(玄陵)의 왕사 나옹(懶翁)과 한산 목은 선생 두 사람이 와서 놀았다. 이로부터 이 절이 기좌(畿左)의 유명한 절이 되었다 한다. 과연 신륵사는 우람한 우두산(牛頭山) 혜목산(彗目山) 낙맥이 줄기차게 뻗어 내리다가 평탄하게 봉이 솟아내린 여강의 동대(東臺)에 이르러 절경을 이룬 봉미산 기슭에 있다. 원래 이 절은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구전되기도 하나 사기(史記)에는 누가 창건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곳에 절터를 잡은 개산조(開山祖)는 아마도 운치 있는 멋을 풍미할 줄 아는 스님이었을 것이다. 꽃봉오리를 에워싸듯 여강이 휘감아도는 동대에 벽돌탑[塼塔]을 쌓고 중생계(衆生界)의 복락(福樂)을 기원하던 그 불심(佛心)은 고고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처럼 신륵사에는 이 전탑으로 해서 옛부터 벽절 혹은 벽사라 하였다. 이 전탑은 벽돌마다 당초문(唐草紋)이 아로 새겨져 마치 옛 선현들의 지문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감흥을 일게 한다.

대웅전 앞뜨락에 나서면 다층석탑이 있는데 이 탑에는 정교한 비룡이 용트림 하는 듯한 조형(造形)이 있어 옛 석공의 돌 쪼는 정소리가 은은한 풍경처럼 아직도 귓전을 울리는 듯하다.

봉미산 중턱에 나옹선사의 부도를 모신 석종(石鐘)이 있는데 이 진당(眞當)을 오르자면 대들보가 없는 조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는 고려말에 불교계의 한가닥 빛이 되었던 고승들을 모시고 있다. 이들은 지공, 나옹, 무학으로 소위 3화상(和尙)이라 불린다. 이들 가운데 지공은 인도 스님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계법을 전한 고승이며, 나옹은 고려 공민왕의 왕사로서 영원사(瑩源寺)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한 고승이다. 그리고 무학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개국케 한 왕사이다. 이들 3화상의 덕을 기리고 그들의 설법을 숭모(崇慕)하기 위해 건립된 조사당(祖師堂) 앞뜰에 용트림하듯 수령 오백 년을 자랑하는 향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가 바로 무학대사가 스승을 기리기 위해 식수한 것이다.

조사당엔 이들 3화상들의 영정이 있는데 그 중앙에 나옹 그리고 좌우에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봉안해두고 있으며, 또 목조의 나옹화상 독존을 안치했다. 경내에서 이 조사당이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 그 외에 신륵사에는 고려말기의 중요한 금석문(金石文)들이 즐비하다. 나옹의 석종비(石鐘碑)를 위시하여 대장각비(大藏閣碑)가 그것이다.

이러한 비문들은 고려 말기에 매우 흥성했던 신륵사의 사격(寺格)을 짐작케 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목은 이색이 선왕 현릉 즉 공민왕의 자복(資福)과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하여 장경(藏經)을 인출(印出)하였음을 대장각비를 통해 알 수가 있다. 나옹의 제자들과 더불어 권선(勸善)하는데 자초(自超, 무학대사)가 화부를 총괄하였으니 나옹, 무학, 목은 등은 벽사에서 깊은 인연을 점철하고 오늘날까지 모두 명성을 날리고 있다.

최수(崔脩)의 시에 이르기를 ‘벽절 종소리 한밤에 울리니(甓寺鐘聲 半夜鳴), 광릉에서 돌아오는 손의 꿈이 처음 깨었네(廣陵歸客 夢初驚). 만일 장계로 일찍이 여기를 지나게 하였다면(若敎張繼 會過此), 꼭 한산만이 홀로 이름을 얻지 못했으니(未必寒山 獨檀名)’하였다.

최수의 시구로 볼 때 신륵사의 경승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고, 당대의 문인 목은 선생이 벽사와 깊게 인연된 것으로 명성을 떨쳐다고 한 이 사찰에는 마암대(馬巖臺)와 더불어 용마(龍馬)에 대한 전설이 숱하다.

옛날 도력 높은 고승이 벽사를 창건할 때 여강을 넘나드는 아홉 마리의 여용(驪龍)이 있었는데 이 여용들이 머물렀던 곳에 절터를 잡았다는 전설이 구전되는 이곳엔 구룡루(九龍樓)라는 누각이 있다.

그 누각 안에 신륵사라는 현판이 힘찬 서필(書筆)로 이곳을 찾는 방문 객(客)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데 신륵사라는 이름에는 이런 유래가 있다.

여주는 완만한 구릉지가 많아 수림이 울창하고 토질이 기름져 여강유역 농경은 예로부터 농사가 잘 되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일설에는 어느 날 포악한 용마가 나타나 농작물을 마루 짓밟고 사람들이 얼씬만 하면 그냥 물어뜯어 사람들은 이를 피해 집안으로 숨기 바빴고 절 근처도 얼씬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용마의 피해가 심한 것을 벽사에 와 있던 나옹선사께서 못 들을 리 없다. 선사께서 하루는 포악한 이 용마를 다스리기 위해 이상한 굴레[勒]을 씌워 용마를 다스렸더니 이후부터는 양마(良馬)가 되었다. 그후 신기한 굴레로 말을 다스렸다 하여 이 사찰을 신륵사(神勒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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