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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산의 전설

하늘에 뜬 아오록한 구름에 감싸인 첩첩한 고갯마루 용문산(龍門山), 칠읍산(七邑山) 품에 담쑥 안긴 듯 싶은 산이 싸리산이다.

고려말에 충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가 머물러 조선조의 걸출한 시인묵객들이 무수하게 찾아들어 임장강(臨長江)에 어리는 노을을 뜨안아 청심루를 노래하던 옛터에서 굽어 보이는 강 건너 천년의 요새 팔대수(八大藪 : 옛 지명 貝多藪) 한 발 너머 좌정한 산이 원래 수용산(睡龍山)인데 옛날 마당바위에서 쌀이 나왔다 해서 이 산을 싸리산이라고 한다.

산세는 우람한 혜목산(彗目山)에서 두 갈래 뻗어내린 줄기가 금당천(金塘川)을 감싸며 남쪽으로 맥을 이어 봉미산(鳳尾山)에 이르러 천하의 명소 신륵사가 있고, 서쪽으로 뻗은 청산(淸山) 줄기를 타고 낙맥(落脈)이 굽이쳐 내려 수용산(睡龍山)을 조형하며 감도는 연자탄 여울물 수하(水下)로 산세의 흐름이 영릉(英陵)까지 뻗쳤다.

팔대장림(八大長林)으로 덥수그러진 산경(山景)을 최숙정은 시문(詩文)으로 읊조리길 ‘평림(平林)을 내리보아도 다함이 없어 강가에 있다랐네(平林望不窮 一趾連江濤). 울밀한긴 백년등이요, 우거진 것은 천년된 나무이네(鬱密百年藤 蒙茸千歲樹). 족제비와 다람쥐도 집을 짓고 여우와 토끼는 성을 쌓았네(鼯鼪作家鄕 狐兎爲城府). 기색은 멀리 아득한데 천택은 참으로 아름답구나(氣色莽蒼蒼 川澤儘). 이곳에 깊이 숨을 만하니 혹시 옛날의 소부있을지(此中可深藏 恐有古巢父)’ 하였다.

출렁대며 굽이쳐 흐르는 여강의 한적한 대교를 건너 싸리산을 향해 가는 길에 접어든 첫 동네가 오학동이다.

오리안골 나지막한 언덕 블록담으로 둘러진 이 동리 경로당에서 오학(五鶴)의 유래를 알아보니 예로부터 완만한 비지고개가 흡사 살구꽃이 떨어지는 형세여서 이곳에 황학(黃鶴)이 제일 먼저 찾아들었다 하여 황학(黃鶴) 낙지형(落地形)이라 하였고, 오리안골은 마치 오리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어서 학자(鶴仔) 반모형(返母形)이며, 강언덕에 울창한 숲 사이로 독 굽는 가마에 등걸나무를 지피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전경이 강물에 어리는 경승(景勝)으로 여주팔경을 돋보이게 하는 이곳의 군학(群鶴)들이 황학산을 향해 노을 드리우며 저물어가는 하늘에 한강(漢江)을 재촉한다 해서 학동(鶴洞)을 군학(群鶴) 도강형(渡江形)이라 한다는 구전이 있다.

조선백자의 맥을 잇는 학동 도예촌(陶藝村) 도공들의 바쁜 손길과 촌로(村老)들의 그칠 줄 모르는 이야기를 뒤로 하고 등성이와 같은 고갯길을 넘어드니 눈앞에 싸리산의 자태가 선명하다. 산등성이에 돌이 듬성듬성 박혀 있어 돌박지 산(山)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옹기 굽는 가마터가 많아 옹담동이므로 독바우라 부른다고 한다.

팔대수(八大藪)가 있던 자리는 지금은 자취가 없고 그저 허허벌판뿐이다. 그곳이 임진왜란 때 원호대장군과 왜병 간에 격전이 벌어졌던 요새였다고 한다.

바로 그 아래 강물에 치명나무가 잠겨 있어 가물 때마다 동아줄로 나무를 매어 흔들기만하면 신기하게도 비가 내려 여주지방은 가뭄을 모르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니 여주쌀의 질이 으뜸인 것도 우연만은 아닌 듯싶다.

치명나무가 되려면, 뿌리 박고 천년(千年), 건천에서 천년(千年) 물 속에서 천년(千年)을 썩지 않고 견뎌야 되는데 신기한 이 치명나무가 해방 몇 해 전 큰 장마에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산마루에 덩실한 바위가 눈길을 끄는 싸리산 아랫동리 고개 밑에 다다랐는데 옛날 이 산에 봉화대(烽火臺)가 있어 충주 국망산(忠州 國望山)에서 봉화를 들면 싸리산에서 봉화를 받아 용문산에서 다시 봉화를 올려 서울로 연계되어 나라 변방의 위급한 일이 전해졌다는 산이다. 산 정상에 오르면 집채만한 마당바위가 남방향인 여주읍쪽으로 자리해 있고 멀리 여강을 따라 산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쪽리바위, 요령바위, 굴바위, 효자바위, 흔들바위 등 여기저기 산재한 바위들이 모두 영릉 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 조화를 이룬 것이 기이하다. 옛날 암자가 있었다는 터에 여기저기 와력(瓦礫)이 산재해 있다.

옛부터 전해오길 이곳에 있던 암자에는 고승과 수행자 몇 분이 단촐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이곳에 있는 마당바위에서 신기하게도 쌀이 겨우 요식할 만큼 또옥또옥 나왔다는 것이다. 어느 날 고승이 먼 길을 순행키 위해 길을 떠나며 함부로 이 바위를 다루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는데 그만 처사가 쌀 나오는 곳을 정으로 쪼아 넓혔더니 그나마 나오던 쌀이 뚝 그치고 말았다 한다. 그때서야 고승의 타이름을 깨달았으나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 이 암자에는 먹을 것이 없어 수행자들도 떠나고 암자가 있던 빈터에 동강난 미륵만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뚝 선 마당바위 바로 아래서 쌀 대신 하얀 백토가 나와 이 고장에서 도자기를 구울 수 있게 되어 처사의 잘못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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