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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왕사 나옹선사의 입적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이던 나옹선사의 이름은 혜근(惠動)이요, 호는 나옹(懶翁), 속성은 아씨(牙氏)이며, 아명은 원혜(元慧)라고 하였다.

선관서령(善觀署令)명의 벼슬을 지낸 그의 선고(先考)는 서구(瑞具)였고, 모친(母親)은 정씨(鄭氏)로서 영산군 사람이다.

하루는 꿈에 어머니가 황금빛 새 한 마리를 보았는데 그 새가 어머니에게로 날아들어 머리를 쪼면서 오색찬란한 알을 품에 떨어뜨리는 꿈을 꾼 후 이내 태기가 있어 1320년(충숙왕 7) 정월 보름달 원혜를 낳았다.

원혜가 20세 되던 해 동네친구가 죽자, 슬픈 생각을 품고 공덕산(功德山) 묘적암(妙寂庵)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가서 머리를 삭발했다.

이어 여러 고승(高僧)을 찾아 전전하다가 서천(西天)의 지공(指空)과 절서(浙西)의 평산(平山)에게 법을 이어받아 그 종풍(宗風)을 크게 드날렸다.

나옹은 원나라 연경에 가서 유학하고 법원사(法源寺)의 지공(指空)과 자선사(慈禪寺)의 평산(平山)에게 수학한 후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받고 오랫 동안 불법에 힘쓴 바 있다.

원제(元帝)도 나옹선사를 칭찬하고 격려하여 광제선사(廣濟禪寺)에 머무르게 하고, 금란가사와 불자를 내려 그 법을 크게 빛내고 평소에도 그의 게송을 사람들에게 많이 보냈다.

나옹선사가 평산화상(平山和尙)을 찾아 뵈었을 때 일이다. 평산은 물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을 보았는가?” 나옹은 대답했다. “서천(暑天)의 지공(指空)을 보았는데 그는 날마다 천검(千劒)을 썼습니다.” “지공의 천검은 그만 두고 그대의 일검(一劒)을 가져오라.” 평산의 말이 끝나자 나옹은 좌법하고 있던 방석을 내밀었다. 그 순간 괴이한 일이 생겼다. 솜으로 만든 방석이 일순간에 몽둥이로 내려치는 것 같았다.

“이 도적이 나를 죽인다.” 평산은 외쳤다. “내 검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하며 쓰러진 평산화상을 나옹은 일으켰다.

이후 평산은 설암이 전한 급암의 가사와 불자로 믿음을 표하였다.

나옹은 무술년 봄 수기(授記)를 얻어 귀국해 산수(山水) 속에 자취를 감췄다. 공민왕이 그 이름을 듣고 사신(使臣)을 보내오기를 청하여 만나보고 공경하여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 후 머물던 신광사를 떠나 다시 산협(山峽)이 웅장하며 수려한 용문산, 원적산, 금강산 등지로 순행한 뒤 아직도 먼 산 봉우리와 깊은 산 계곡에 잔설이 남아 있던 그해 겨울 보암(普巖)장로가 지공이 유촉(遺囑)한 가사 한 벌과 편지 한 통을 받아가지고 와서 나옹선사에게 주었다. 나옹은 그것을 입고 향을 사른 뒤 보설하였다.

경술년 첫날 아침에 사종달예(司從達睿)가 지공의 영골 사리를 받들고 회암사에 도달했다. 나옹은 그 사리에 예배하고 산(山)을 나왔다. 임자년 가을 지공이 가리킨 삼산 양수의 예언을 생각하고 회암사 북쪽 봉우리에 지공의 영골 사리를 봉안한 탑(塔)을 세웠다.

그해 9월 23일에 임금이 돌아가시니 몸소 빈전에 나아가 소참(小參)하고 서식을 갖추어 왕사의 인(印)을 조정에 돌렸다. 우왕께서도 즉위한 후 빈인(賓印)을 내어 왕사(王師)로 봉하였다.

병진년 봄 회암사의 공사를 마치니 서울 밖의 사중(四衆)들이 구름과 바퀴살처럼 모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마침 대평(臺評)이 생각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과 가까우므로 사중의 왕래가 끊이지 않으니 폐업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임금의 명령으로 밀양의 영원사(塋源寺)로 옮기게 되어 나옹의 출발을 재촉하였다.

나옹은 마침 병중에 있어 남여(籃輿)를 타고 삼문(三門)의 남쪽에 있는 못가로 나갔다가 스스로 남여를 멘 사람들을 시켜 열반문으로 나왔다.

“힘쓰고 더욱 힘쓰시오. 나 때문에 중단하지 마시오. 내 걸음은 여흥(驪興)에서 멈출 것이오.” 나옹선사는 말했다.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 탁준(卓濬)에게 “나는 지금 병이 너무 심해 배를 타고 가고 싶소” 하였다. 그리하여 배를 타고 산모퉁이를 돌아 유유히 흘러가는 물굽이를 거슬러 떠난 지 이레 되는 날 여흥의 경승지 신륵사에 도달하였다.

병이 조금 덜하길 기다리는데 여흥수(驪興守) 황희직(黃希直)과 도안감무 윤인수(道安監務 尹仁守)가 닥담의 명을 받고 출발을 재촉했다.

시자가 이 사실을 말하자 나옹은 말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아주 가리라” 하고는 제자들을 불렀다.

노승은 “오늘 너희들을 위해 열반불사를 지어 마치리라” 하고 조용히 설법하시고 입적(入寂)하시니 그때가 5월 15일 진시였다.

나옹선사가 입적하실 때 여흥 고을 사람들은 찬란한 오색구름이 봉미산봉을 휘덮는 것을 보았고 타던 흰 말은 삼일 전부터 풀을 먹지 않은 채 머리를 떨구고 슬퍼 울었다고 한다. 다비(茶毘)를 동대(東臺)에서 모시고 사리를 수습하는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수백 보 안에서 비가 내리고 사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봉미산 마루에 신광(神光)은 비치고 신륵사의 중 달여(達如)는 꿈에 여용(驪龍)이 소분대(燒焚臺)에 서려 있다가 강(江)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데 그 형상이 말과 같았다고 한다. 신륵사 봉미산 중턱에 정골 사리를 모시고 그외 사리를 회암사로 모셔가려 할 때 가물의 물이 얕음을 걱정하였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 묶였던 배들이 떠갈 수 있어 여용이 도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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