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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골에 얽힌 전설

천년사직(千年社稷)을 지켜보듯 유유히 흘러가는 남한강 오백 리, 정수려(晶秀麗)한 첩첩산령(疊疊山嶺) 마루, 크고 작은 산봉(山峯)을 물그림자 지며, 즐펀한 들녘을 운치 있게 여강(驪江)을 굽어보듯 좌정(坐定)한 산이 황학산(黃鶴山)이다.

장려한 우두산(牛頭山) 낙맥(落脈)이 줄기차게 뻗어내린 봉미산이 있고 예로부터 낙토라 일컬어 지는 아늑한 이곳에 자리잡은 천년고찰 신륵사(神勒寺) 동대(東臺) 강월헌(江月軒)에서 건너다 보이는 강변 관광지 내의 느티나무숲을 따라 강을 거슬러 조금 오르면 용(龍)늪이 있다.

오랜 옛날 용(龍)늪 기슭에 소를 매두면 용이 소를 잡아 먹는지 소는 온데간데 없고 다만 코뚜레만이 물 위에 떠다니기 일쑤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이곳에 늪이 있는 데서 연유되어 동명(洞名)이 연촌(淵村)이라고 한다.

바로 이 마을 옆 동리 양촌(陽村)이란 곳을 지나면 한 동리가 있는데 승천하는 용의 비늘이 매화꽃처럼 흩날려 떨어진 동리라 하여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으로 마을 이름조차 매룡동(梅龍洞)이다.

산세가 금방 용(龍)늪에서 나온 용이 용트림하며 뇌성벽력을 일게 하고 하늘을 오를 듯 웅비하는 기세로 도사린 황학산 아래 옹기종기 자리잡은 동네가 용강(龍江)골이다.

원래 경동(畊洞)이었던 용강골은 건너편 황학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던 부락이었는데 그곳에 있던 집들은 모두 없어지고, 오로지 용이 승천할 때 산능선이 짝 갈라져서 용이 간 곳이라는 뜻에서 용(龍)간골이 용강(龍江)골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주시청에서 남쪽 방향으로 약 2km 떨어진 용강골을 가자면 이름 모를 숱한 꽃송이가 덧없이 피었다가 덧없이 졌다는 고개란 데서 유래되어 ‘송아리 고개’라 부르는 고개를 오른편에 바라보면서, 여주시 상동 동구를 막 벗어나자면 예로부터 시내를 드나드는 문이 있었다는 예문 고개가 ‘이문 고개’로 변해 불리게 된 곳을 지나게 된다.

눈길을 들면 돌고개 시선이 머무는 곳에 영월루(迎月樓)라는 누각이 있는데 서하군(西河君) 임원준(任元濬) 선생이 당(堂)을 짓고 사우(四友)라 이름하여 경·목·어·초(耕·牧·漁·樵), 즉 농부, 목동, 어부, 초부와 같이 벗하며 지내자는 뜻에서 취한 편액을 달았다.

서거정(徐居正)이 오랜만에 여주를 찾아들어 이에 대한 기문을 쓰고 시(詩)를 읊조리기를,

“어리고 젊어서 여주에 놀았더니 40여 년 만에 이제 머리 돌렸네(小少遊黃驪四紀今轉頭). 누에 올라 긴 강을 굽어보니 아 한시라도 쉼이 없구나(登樓俯長流慨槪無時休). 황학은 가고 돌아오지 않는데 앵무주에 풀만 무성하구나(黃鶴去不返 草藪鸚鵡洲). 시를 쓸제 최후(崔侯)를 생각하니 걸구가 천추에 전하누나(題詩憶崔侯 傑句傳千秋). 그대 이제 가풍을 이었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물과 같이 길이 흐르네(君今繼家 美名水同流)”라고 하였다.

마라우 오른편으로 접어들어 만리(萬里)재를 바라보며 완만한 외산길을 따라 산등성이를 넘어서면 바로 용강골에 다다른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마는 옛날에 어느 옹주묘(翁主墓)가 있었다고 전한다. 다만 예조판서를 지낸 박주수(朴周壽) 분묘가 동리 뒷산에 있고 빤히 건너다 보이는 앞산 능선에 호조판서를 지낸 박종보(朴宗輔)의 묘가 멀리 마감산 기슭을 내다보듯 자리한 분묘 아래 논에 명주실 한 타래를 다 풀어넣어도 끝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은 용(龍)늪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도사 한 사람이 황학산 아래 옹기종기 모인 몇 집 안되는 경동(畊洞) 마을로 접어들더니 어느 대갓집 문전 안으로 들어서서 주인을 찾는다. 지나다 목이 말라 물 한모금을 청한다 하니 처자가 뒤울 안 우물로 가서 냉수를 정성스럽게 떠다 올리니 단숨에 물을 마신 도사가 이거 큰일났군 하며 물그릇을 내줄 새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전하여오길 용이 이곳에서 승천만 하면 인근에서 큰 인물이 나온다는 소문이 당(唐)에까지 퍼져 천하에 알려졌다. 이런 소문을 들은 당 황제가 사신들에게 용이 승천하지 못하게 산혈(山穴)을 끊고 오라는 명을 내렸다.

예나 지금이나 도참설의 이론체계를 보면 자연의 체계를 무생물로 보지 않고 생명체로 보고 있다. 풍수설이 인생의 화복과 깊이 연관되어 산수에 따라 쇠하고 왕성함이 있고 순(順)하고 역(逆)함이 있다는 이치를 우리 조상들은 모두 풍수설로 귀납하여 모든 일을 처리하였던 것이다.

일제시대에도 큰 인물이 날까봐 여주의 명산(名山)에는 일인(日人)들이 맥을 끊는다고 곳곳에 쇠물을 끓여부었던 것과 같다. 당의 사신들이 그러한 사명을 띠고 용강골을 찾아 오다가 군내 능서면 양거리(郡內 陵西面 兩巨里)라는 동네 앞에 당도하였다.

워낙 먼길을 천신만고 끝에 오느라고 짚고 오던 쇠지팡이가 다 닳고 신고 온 쇠나막신도 다 닳아 모습은 초췌하고 지친 사신들이 어느 정자나무 아래 쉬고 있자니 그곳을 향해 어떤 노인이 숨을 몰아쉬며 다가선다. 그리고 “머나먼 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하고 인사를 하더니 묻지도 않았는데 그곳을 찾아가려면 광대한 리(里)를 지나 광대리(廣大里) 이천의 거리를 지나 연라리 억억다리를 건너(흥천면 효지리에 있었음.) 만리(萬里)재를 넘어야(용강골 산의 이름) 비로소 그곳에 당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신들은 자신의 정체를 쉽게 알아차리는 노인에게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또한 목적지가 너무도 먼 거리임에 입을 딱 벌리고 양거리(兩巨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신들이 돌아온 그 이튿날 처자가 꿈을 꾸는데 냉수를 마시고 간 도사가 천년비기(千年祕記)를 쓴 부적을 용에다 던지니 부글부글 용늪이 끓어 오르더니 이내 휘황찬란한 광채가 나며 용이 승천을 하는데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한다. 깜짝 놀라 깨어 밖으로 나가보니 과연 꿈에서 본 것과 같은 경이로운 정황에 넋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도사도 용도 보이지 않고 용이 간 흔적을 따라 산능선이 갈라지고 오색구름이 산봉을 뒤덮었다. 바로 이 황학산(黃鶴山)을 이때부터 승산(勝山)이라고 부르는데, 이 승산(勝山) 언저리에서 세종대왕 어머니 원경왕후 여흥 민씨(閔氏)와 명성황후 등 여덟 분의 왕후가 여주의 맥을 잇고 태어난 것은 천 년을 다 채우고 용이 승천한 용강(龍江)골 때문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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