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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금산의 전설

옛부터 여강 연안은 선사문화 유적이 완연하여 오대문화권(五大文化圈)으로 손꼽힌다. 고지명(古地名)에는 점량면(占梁面)과 근동면(近東面)이 합쳐진 점동면(占東面)에 개만한 금이 묻혀 있어 속칭 개금산이라고 하는 강금산(剛金山)이 있다. 바로 이 고장 인근의 산세는 고려의 경순왕후(敬順王后)와 조선조 세종대왕의 어머니 원경왕후(元敬王后) 여흥 민씨를 비롯해 여걸 명성황후 등을 배출한 명산이 즐비한 낙토(樂土)이다. 산천은 강금산 남쪽 멀리 백족산이 있고 북으로는 천년을 묵좌(默坐)한 자태의 소무산이 있다. 거울처럼 흐르는 청미천(淸美川)에 산봉은 여울지니 가히 절승이다.

턱에 와 닿는 듯한 신통산(神通山) 지내혈(穴)을 따라 북서쪽으로 오르면 마치 강금산의 금(金)자를 따라 동리 이름들이 금곡리(金谷里), 금당리(金塘里), 안금리(安金里) 등 금자로 이어진다. 또한 군사(軍士)가 보호라도 하듯 산 이름들이 대포산, 철갑산(鐵甲山)으로 연계되며, 이곳이 귀중한 지역이라는 뜻에서 변방의 마을 이름조차 하귀리(下貴里), 양귀리(楊貴里) 등으로 불려진다. 실로 명산의 흐름이 분명하여 신통산이 강금산을 보호하고 있는 형국이다. 강금산은 예종께서 영릉(英陵)을 천릉(遷陵)할 때도 여흥(驪興)의 성산(城山)이 용인(龍仁)의 금령산(金嶺山)과 함께 길흉을 전달한 산이기도 하다.

옛날 당(唐) 황제(皇帝)가 어느 날 아침 세수를 하려다가 기이한 현상을 보았다.

세숫물을 떠놓은 대야에서 밝은 광채가 일어나며 개 형상의 금이 일렁이는 물속에 비치는 것이었다.이를 본 황제는 신하를 불러 이런 기이한 일에 대하여 알아보라고 명했다. 신하들은 여러모로 알아보고 황제께 아뢰었다. “신들은 알 길이 없사와 유명한 점술가(占術家)에게 알아보니 동방(東方)의 신라(新羅)에 금(金)자 들어가는 산 양기슭 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복자(福字)가 들어가는 하천으로 흘러 금자(金字)가 들어가는 내를 따라 금자(金字)가 들어가는 산을 찾으면 그 산에 개만한 금덩이가 있사온대 그 형상이 비친 것이며 동방의 신라가 날로 강성해지는 것은 그 때문인 것입니다” 하고 아뢰었다. 이러한 진설(珍說)을 듣고 난 황제는 지금 당장 동방 신라로 가서 그 금개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 오라는 명을 내렸다. 당에서 신라를 가려면 고구려를 지나야 되는데, 고구려와 당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고구려 사람을 닮고 고구려말에 능통한 사람을 뽑아 신하와 함께 보내기로 하였다. 명을 받은 신하(臣下)와 일행들은 천신만고 끝에 험준한 산길과 물을 건너 여러달 지나 비로소 가서 용인 땅에 다다랐다. 산세가 웅대하고 그윽한 어느 산 아래의 너른 들에 도착하여 마침 들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던 농부에게 “금자(金字)가 들어가는 산에서 물이 우수(雨水)로 흐르고 복자(福字)가 들어가는 하천으로 흐르는 발원지의 산이 어디냐”고 물었다. 농부는 물끄러미 드높은 하늘을 쳐다보며 사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앞산을 손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여러분이 찾는 산이 저 산이오. 저 산이 금자(金字)가 들어가는 금백산(金泊山)이라는 산이오” 하며 손짓으로 산을 가리킨다. 금백산은 용인군 내사면과 광주군 도척면에 걸쳐 있는데 이 산에서 발원한 물이 마장면 단거리 들녘에서 양수가 합수되어 복하천(楅河川)을 이룬다.

농부가 “대체 어디서들 오셨으며 어디를 찾아가는 중이냐”고 묻자 사신들은 머뭇거리며 지나온 사연을 모두 이야기하며 좀 도와달라고 하였다.

밭머리에 서 있던 농부가 나무 그늘로 들어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금수발수 복하천(金水發水楅河川) 하구금사 강금산(河口金砂 剛金山)” 하고 읊조린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사신(使臣)들이 물으니 “개만한 금이 있다는 여흥부(驪興府) 점량면(占梁面) 강금산(剛金山)을 찾아가시는 길이군요” 한다.

사신들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 물었지만 이렇게 속시원한 답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눈이 번쩍 빛나며 바싹 다가앉아 길을 일러달라고 애걸했다. 그들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하며 농부는 난색을 띤 표정으로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곳은 너무나도 멀어 당나라에서 여기까지 온 것보다 훨씬 더 머니 찾아가기가 어려운 곳”이라고 한다. 듣고 있던 사신들은 어인 일로 그리 아득하냐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그곳을 찾아가자면 제일역(第一驛)을 지나고 오천역(五千驛, 牛川의 옛 지명)을 거쳐 억만리(億萬里) 고개를 넘어 이천읍(二千邑)을 지나서 구만리(九萬里)들을 건너서 억억(億億) 다리를 넘으면 황학산 남하(南下)에 강금산이 있다고 일러 주었다. 당(唐) 사신들은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반신반의하여 신라가 작은 줄 알았는데 그렇게 크고 넓으냐고 하며 가는데까지 간다고 한다. 농부와 헤어져 한참을 가노라니 첫번째 제일역이 나선다. 과연 농부의 말대로 역(驛)은 틀림없고 멀리 앞을 내다보니 첩첩산만이 아득할 뿐이다. 사신들은 하는 수 없이 차라리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바로 그곳을 작별하고 간 곳이라 하여 오늘까지 작별리라 부른다.

농부가 말한 오천역은 오천으로 옛 지명이 오천(吾川)인 것을 오천(五天)이라 말했고, 이천읍을 지나야 한다는 말은 현재의 이천읍(利川邑)을 이천(二千)이라 한 것이며, 구만리들을 이천(利川)과 여주(驪州) 경계에 복하천변들의 이름이며, 억억다리는 흥천면의 다리 이름이니 사신들은 농부의 말에 속은 것이다.

그때 길을 일러준 농부는 다름 아닌 신통산 신통사의 고승(高僧)으로 강금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농부로 변신한 것이라고 여주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강금산은 세종대왕의 능을 천장코자 상지관과 신하들이 답사한 명산인데 오늘날까지 산 어딘가에 개만 한 금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을주민에 의하면 지금도 야생개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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