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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청백리와 여주목사

조선 제14대 선조 연간에 청백리(淸白吏)에 록선된 이희(세상에서는 이기라고 부른다)대감이 있었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출중했으니 목은에게는 6대손이요, 이조판서 종선의 5대손이요. 영중추원사 계전의 현손이요, 대사성 매(埋)의 증손이요, 한성군 질(秩)의 손자며 영의정 지란(之蘭)의 둘째 아들이다. 벼슬은 병조판서, 이조판서에 오르고 복상(卜相)(정승에 추천되는 일)을 8차례나 받았다. 평생을 빈하게 살며 토지나 종의 수를 늘린 일이 없었고 오직 청렴결백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지방백으로 다닐 때 가는 곳마다 선정비가 선 사람이다. 그는 북원땅(지금의 원주, 간현 또는 간재)이 고향이다. 그가 한 고을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던 중에 그 어머니가 병환이 들어 위독했다.

선조가 특혜로 휴가를 주어 어머니를 간병하게 하면서 경기·강원감사에게 특별히 귀로에 우대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의 호는 송와(松窩)라고도 했으며 만년에는 간현(艮峴)에 산다고 해서 호를 간옹(艮翁)이라고 했다. 어명을 받은 경기감사는 여주목사에게 명을 내렸다. “내일 오시경 여강 청심루 앞을 간옹대감의 행렬이 통과하게 될 것이니 그대는 한치의 어김없이 기다렸다가 후히 대접하고 여정을 편히 모시도록 하라.”

경기감사의 명을 받은 여주목사는 아침부터 이방을 시켜 청심루 앞에서 여강을 지켜 이대감의 행렬이 서쪽에서 보일 때 즉시 보고하도록 배치해놓았다. 그리고 행렬이 도착하는 대로 크게 잔치를 벌여 위로해드려 선조대왕과 경기감사의 영을 받들고 이대감의 환심을 사서 중앙으로 승진을 부탁하는 일거양득의 기회를 잡자는 여주목사의 심산이었다.

오시가 되었다. 이방으로부터 아무런 보고가 없자 좌불안석으로 서성거리던 목사는 청심루로 갔다. 오시가 다 지나고 미시가 지나 신시가 되어도 아무 기별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목사는 다시 청심루에 나갔으나 이대감의 행렬은 보이지 않고 저쪽에 조그만 어선 하나가 청심루 앞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에 작은 어선은 청심루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내려다보니 넉넉지 못한 장사꾼인 듯 사공 하나에 초라한 차림의 행인 하나가 타고 있었다. 이방을 시켜 물어보도록 하니 배에 타고 있던 행인이 대감의 배를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목사는 퇴청도 못한 채 밤늦도록 기다렸다. 그처럼 초라한 행색에 수행원 하나 없이 조그만 배편으로 가는 이를 누가 대감인 줄 알았으랴. 대감은 신륵사 앞에 배를 멈추고 지나는 과객이라 칭하여 중에게 하룻밤 유하기를 부탁하였다. 구룡루에서 밤을 지내고 날이 새자 대감은 다시 뱃길에 올랐다. 아침에 중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중에 사공의 입에서 이대감이란 말이 전해지자 중은 깜짝 놀라 아침식사 대접을 간청했으나 사양하고 배를 띄우니 중은 할 수 없이 여주목사에게 알렸으나 이미 배는 떠나 보이질 않았다.

목사는 낙심하고 관사로 돌아왔다. 대감이 신분을 숨기고 여주를 지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것 외에 무엇이 있었겠는가? 비단 그는 이번 여주를 통과하는 일뿐이 아니었다.

대감의 아들이 현감으로 있을 때 가난한 집 사정을 생각하여 쌀 3말을 대감에게 보내자 민폐라고 해서 아들을 현감직에서 파직시키는가 하면 어명을 받고 호남 지방에 암행어사로 민심을 규찰할 때 무명에 물들인 도포를 입고 밤이슬과 비를 맞으며 다녔다. 어사의 임무를 마치고 귀향하는 길에 호남땅을 벗어나 주막집에 들려 막걸리 한잔 마시려 하자 이대감의 행색을 본 주모는 “손님의 도포는 치마 저고리 한 벌을 해 입으면 좋겠다”고 했다. 포 하단은 물이 바래서 하얗게 되고, 위로는 아직 분홍빛이 남았기 때문에 이런 희롱을 했던 것이다. 또 아들 하나가 지평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의 급보를 받고 간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재넘이 고개에서 검문을 받았다. 초병은 형색이 초라하고 거동이 수상한 이대감을 적으로 간주하고 현으로 잡아가니 아들인 현감이 백배사죄하고 초병을 꾸짖었다. 이때 대감은 내가 신분을 밝히지 않았음이 잘못이니 공무에 충실한 초병은 호통을 칠 것이 아니라 상을 내리라고 했다. 빈한한 생활 중에 말을 잘 거두지 못하여 판서에 임명을 받고 한양 종가(鍾街, 지금의 종로)를 통과할 때 말이 쓰러지니 이조판서의 취임 행렬을 위하여 길을 통제하는 군병들이 그가 판서에 취임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길을 비키라고 호통을 쳤던 일화도 있다. 훗날 거리에서 말이 쓰러지면 “이대감의 말인가 어째 쓰러지느냐”고 하는 등 인구에 회자되는 많은 전설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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