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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새울의 소슬묘

대신면 천서리에 가면 한새울이라는 곳이 있다. 여기에는 주민들에 의하여 왕무덤 또는 소슬묘라고 불리는 묘소가 있는데 이것은 열녀 윤(尹)씨 부인의 무덤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무송 윤판서라는 사람이 지금의 대신면 보통리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이 마을 앞을 지나자 갑자기 그가 탄 말의 말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윤판서는 수행원에게 이르기를 “말이 움직이지를 않으니 요사스런 일이로구나. 혹시 이 고을에 이상한 것이 있나 찾아보도록 하여라” 하였다.

수행원들은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이상한 것은 없고 다만 멀지 않은 곳의 한 골짜기에 수많은 황새 떼가 모여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들은 돌아와서 윤판서에게 고하기를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이상한 일은 없사옵고 다만 저 골짜기에 수많은 황새 한떼가 모여서 주위를 빙빙돌고 있습니다”고 했다.

여기에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윤판서는 그곳으로 가보니 아담한 기와집이 한 채 있는데 그 집 주위에서 황새떼들이 맴돌고 있었다. 집안을 들여다 보니 집은 쓸 만한데 사람은 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이제까지 수없이 맴돌던 황새 떼도 사라지고 이미 날은 저물었고 사람이 살고 있는 집 같지 않으므로 윤대감은 이 집에서 하룻밤을 유하기로 했다.

그러나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길에 오른 윤대감으로서는 특별히 갈 만한 곳도 없는 데다가, 주변 산세가 아름답고 집도 쓸 만하였으므로 영원히 이 집에 정착해버렸다. 윤판서가 이 집에 정착한 후로 모든 일이 마음과 뜻같이 이루어졌으며 생활도 유복해져서 행복한 여생을 보내었다. 윤대감은 4형제의 딸을 두고 있었는데 위로 두 딸은 명문세도가에 시집을 보냈으나 셋째 딸만은 무관인 의성 김씨에게 출가했다. 그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셋째 딸인 윤씨부인의 남편도 전쟁에 종군했으나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이 지나도록 돌아오기는커녕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부인은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도록 천지신명께 빌었으나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전화는 이곳에까지 미쳐 약탈과 만행이 자행되고 있었으니, 어느날 윤씨부인이 마을 앞 샘터(현재 위안동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에서 물을 긷고 있을 때 갑자기 들이닥친 왜군들에게 농락을 당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왜놈의 칼을 뽑아 더러운 손으로 만진 자기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하니 이 샘터에는 그때 흘린 윤씨부인의 핏자국이 얼마전까지도 남아 있었다 한다.

윤씨부인이 죽자 그의 시신을 거두어 샘터 바로 위의 동산에 묻었으니 그후 윤씨부인을 열녀라 했다. 그후 자손들이 묘를 중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안동 노인들에 의하면 윤씨부인의 묘를 왕무덤 또는 ‘소슬묘’라고 하는데 이는 장마 때 묘터에 물기가 있어 묘 옆에 소를 매어놓으면 소 발자국이 뚜렷이 나타나나 다음날 그 자리에 가보면 소 발자국이 없어지므로 이는 땅이 솟아오르기 때문이라 하여 ‘소슬묘’라 한다. 그후부터 이 무덤을 가리켜 ‘소슬묘’, ‘왕무덤’ 또는 ‘열녀무덤’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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