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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와 능촌

여주읍에서 약 5km 떨어진 영동고속도로 여주 톨게이트에서 동쪽으로 약 1㎞쯤 가면 능현동이 있다. 능현(陵峴)은 일명 능촌(陵村)이라고도 하며 이곳이 바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출생지이다. 따라서 이 능현리에는 지금도 소녀시절의 명성황후에 관한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인들 중에는 직접 목격한 사람도 실존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황후가 편발소녀(偏髮少女)로서 코를 흘리며 논에 새를 보던 자리가 바로 능촌 바로 뒷골이었다는 것이다.

능현리 마을 앞에 있는 우물에서 좁쌀을 씻으며 “나도 이 좁쌀만큼이나 많은 노비를 데리고 살아봤으면” 하는 말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 말은 소위 운현궁파(蕓峴宮派)인 대원군과 명성황후와의 정권쟁탈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는 비복(婢僕) 차림으로 궁중을 탈출하여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여주의 민씨촌(閔氏村)이었다. 주내면(현 여주읍) 민씨들은 받기를 거절하여 장호원(長湖院)으로 다시 피신하였다 한다. 도중 어느 동리 앞을 지날 때 주막집 여자가 가마 문을 열고, “보아하니 귀하신 댁 부인 같은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세상이 하도 시끄러워 서울을 떠나노라” 하는 명성황후의 대답에 그 주막집 여자와 동네 부녀자들 몇이서, “그 명성황후 때문에 대가댁(大家宅) 귀하신 부인께서 고생을 하십니다. 그 명성황후가 얼른 그만두어야지” 했다. 대원군의 세력은 또 한 번 뒤집혀서 명성황후는 입궁하는 길로 그 동리의 여자들을 잡아다가 엄벌을 했다 하나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고 구전으로 전하고 있다.

생가 전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라고 쓰여진 비(碑)가 있어 명성황후가 태어난 동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한 피신했던 장호원 왕장리에는 명성황후가 북쪽의 좋은 소식을 기다렸다는 원통산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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