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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고달사지에 서린 전설(1)

북내면 상교리에 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고달사지(高達寺址)가 있다. 일명 고달원지(高達院址)라고 하며 지금은 폐사되어 광할한 사지에 부도와 석불대좌 등 국가지정 문화재 넉 점을 보유하고 있다. 사지를 감싸고 있는 산은 혜목산 또는 우두산으로 825년(헌덕왕 17) 김헌창(金憲昌)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반란을 일으킬 때 이 산을 근거로 산도적의 두목 수신(壽神) 법문과 함께 북한산주(北漢山州)를 공격하다가 도감 청명(聽明)에게 잡혀 참형되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몇 가지 소개하자면 원종대사(본명은 고달이라 함)라는 스님이 절을 창건하기 위하여 각처를 돌아다니며 절터를 물색하던 중 어느 날 지금 행치고개(당초에 행차고개)라고 불리우는 곳에 와서 피로를 풀다가 이 고달사 마을의 산세를 보니 자기가 늘 염원하던 곳과 별 차이가 없어 절터로 적합하였으나 예상과는 달리 계곡이 아흔아홉 골이기에 이상히 여겨 다시 마을에 내려와서 자세히 세어보니 백(100) 골이 분명하여 앞으로 장사(壯士)가 날 것을 확신하고 이곳에서 장사가 나면 잘 키워서 국가에 공헌하고자 절을 건립하고 이름을 자기 본명을 따서 고달사라 지었다고 한다. 원종대사는 고명한 스님이었기 때문에 대사가 고달사를 창건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각처에서 승려와 신도들이 수없이 모여들어 절을 점차로 확장하다보니 현재 고달사 마을을 중심으로 팔만구암자가 생겼다고 한다. 고달사 마을 앞에서 500m쯤 되는 곳 논 가운데 높이 20m 내외의 조그마한 산이 있으니 이 산을 신털이봉이라 하는데 고달사 승려들이 각처에서 시주를 받아가지고 해질 무렵 고달사 입구에 도착하면 피곤하여 이곳에서 쉬면서 신을 턴 먼지가 쌓여서 된 산이라 하여 신털이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원래 이 봉우리 위에서 중들이 앉아서 쉬던 쉴터바위가 있었는데 이 위에 묘를 쓸 때에 지장이 있다 하여 없애버렸다는 설이 있다. 한편 고달사는 날로 번창하여 전국 각지에 알려지니 각처에 있는 유명한 대사들이 자주 다녀갔다고 하는데 어느 날 모 대사가 왔다가 가는 길에 이 절에 있는 여자 신도 한 사람을 보니 그 상이 수도를 그만두고 속가에 가서 결혼을 하게 되면 삼정승(三政丞)을 낳을 사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 여자의 배필이 될 사람은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대사는 그 길로 여흥(현재 여주)목사 사가에 가서 하룻 저녁 유숙하게 되었는데 저녁에 목사와 함께 좌담하던 중에 목사가 아들의 혼처를 근심하니, 대사는 혼처 좋은 곳이 있는데 이 규수는 장차 고달사에서 장사가 출생하면 그 장사와 함께 성혼할 사람이어서 곤란하다고 하였다. 목사는 이 말을 듣고 나의 며느리가 되게 할 묘책이 없겠느냐고 물은즉 대사의 말이 모년 모월 모일에 고달사 진잠바위(징바위)에서 한 사람의 장사가 출생할 터이니 관졸을 풀어서 매복시켰다가 장사가 나오는 즉시 칼로 목을 베이되 다시 목이 붙지 않도록 재를 뿌리면 장사가 죽게 되어 며느리를 삼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목사가 관졸을 매복시키고, 장사가 출생하기를 기다려 목을 베어 죽여버렸다. 한편 고달사의 원종대사는 장사가 출생하기 전날 밤 혼미한 중에 꿈을 꾸니 장사가 출생하자 관졸에게 죽으니 이상하게 여겨 밖에 나와 천기를 보니 꿈이 허사가 아니었다. 놀란 대사는 장사가 출생하리라고 예측한 현재 진잠이라고 불리는 바위에 가보니 꿈과 같이 관졸이 장사가 출생하자 즉시 목을 베어 죽이니 앞서 말한 여자 신도가 나타나서 장사의 목을 안고 통곡하며 함께 죽었다고 한다.

장사를 훌륭하게 키워 국가를 보위하려는 원종대사의 계획과 이 여자 신도에게 아들을 장가보내려는 여흥 목사의 계획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와 같은 결과를 보게 된 원종대사는 즉시 절로 돌아와서 여러 승려들을 모아놓고 이 같은 사실을 알린 다음 증골(마을에서 동쪽으로 1km쯤 떨어져 있음) 수리바위에다 술을 빚어놓고 북바위에서 북을 치고 진잠바위에서 징을 쳐 장사의 명복을 빌고 난 후 모든 승려들에게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어서 떠나니 나의 뜻을 이어 고달사에서 매년 한 번씩 장사의 명복을 빌어줄 것을 당부하고 절을 떠났다고 한다.

원종대사가 떠난 후 흉년과 기근이 심하고 도적이 일어나 절은 피폐하고 스님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때 노승 한 사람이 나타나 능히 사람이 먹으면 허기를 면할 수 있는 흙을 발견하였으니 지금의 사기골(쌀기골 : 상교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땅속 깊이 묻혀 있는 흰색 점토가 바로 이것이라 한다.

그러나 흙을 먹고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장기간 도저히 생명을 유지할 수 없어 승려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이곳 고달사는 주인 없는 절만 덩그러니 남아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절에 빈대만 번성하고 산짐승과 산새들만이 옛 주인을 부르며 애통하게 울었다고 한다. 또한 고달사지 승탑 후면 약 500m 지점에 있는 고려시대 장터는 고달사 창건 후 승려들이 칠십이 넘으면 불법(佛法)에 의하여 이곳에다 산 사람을 장사 지냈다고 하는데 이는 천리(天理)를 거역하는 바이어서 하늘도 무심치 않아 그후 산사태와 홍수로 절은 파손되고 웅장한 유물만이 남아 있으며 빈대는 뒷산 바위틈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이 사지의 서쪽에는 빈대바위가 있어 지금도 바위를 뒤집으면 죽은 빈대껍질이 나오는데 이때 피신한 빈대의 죽은 껍데기라 한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경내 어느 지점이라도 1m만 파면 과거 절에서 사용했던 기왓장이 안 나오는 곳이 없다 하며, 분명하지는 않으나 석불 1점과 대웅전에 안치했던 불상이 경내 어디엔가 묻혀 있을 것으로 주민들은 믿고 있다. 고달사지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북바위가 있고, 서쪽에는 빈대바위가 있으며, 남쪽에는 사기골이 있고, 북쪽에는 진잠바위(징바위)가 있다. 진잠바위는 장사가 나왔다 하여 장사터라고도 하며, 이 바위 밑에는 산신당이 있어 6·25 전까지만 해도 매년 정성을 들여 제사를 지내 마을의 행운을 빌었고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일체 금했다고 한다. 해방 전에는 주민들이 이곳을 신성시하여 출입을 삼갔을 뿐 아니라 주변 다른 산은 모두 송충이가 침범하여 나무들이 고사하여도 유독 이곳만은 송충이가 침범하지 못해 항상 나무가 푸르고 울창하였다 한다.

또 포수가 사냥을 할 때에는 꼭 이 산신당에 들러 사냥의 안전을 빌고 갔다 하며 만일 이것을 무시하고 간 사냥꾼은 반드시 사냥에 실패하거나 해를 입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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