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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일곱 나이에 피난길의 식구를 모두 살린 민유중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며, 민정중의 동생이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1650년(효종 원년) 문과에 각각 급제하였다. 그의 딸이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에 책봉되자 그는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노론의 중진으로 경서에 밝다는 평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전국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집집마다 피난길을 떠나기에 정신이 없었다. 조정이 수도를 강화로 옮기려 하자, 대부분의 백성들도 ‘강화는 천연의 요새라 믿을 만한 곳이니 피난을 강화로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 나이 어린 민유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님이 가시는 곳에는 으레 적군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들었습니다. 강화로 가는 것은 반대입니다.”

이때 민유중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다고 한다. 결국 민유중의 집은 피난을 영남으로 갔고 일가가 모두 안전할 수 있었다.

민유중이 사서(司書)로 있을 때의 일이다. 글을 읽기 위한 휴가를 청하는 소를 올리니 임금이 공부에 독실한 그의 성의를 아름답게 여겨 수년 동안 발령을 유보하여주었다.

어릴 적에 동춘 송준길(宋浚吉)에게 글을 배우고 뒤에 그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송나라 때 주자(朱子, 이름은 희(熹))와 황면재(黃勉齋, 이름은 간(幹))의 사위와 흡사하다는 말을 들었다. 민유중은 또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우암과 여러 면에서 처신과 입장을 함께하였으며 길흉영욕(吉凶榮辱)을 함께 나누었다.

민유중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밤 꿈에, 예전에 의술로 궁중에서 이름을 얻은 안씨 노인이 찾아와서 식구 백 명이 흉년으로 굶어 죽게 생겼으니 쌀을 좀 달라고 하였다. 그 안씨 노인이 의술로 이름을 떨칠 때 민유중의 집안도 그의 치료를 받아 많은 효과를 본 적이 있었으므로 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집은 어디에 있는가?”

“제 손자 놈 이름이 세원(世遠)이며 재령(載寧) 유동(柳洞)에 살고 있습니다.”

꿈이었지만 그 꿈 내용이 너무도 생생하여 즉시 붓을 들어 ‘載寧 柳洞 安世遠(재령 유동 안세원)’이란 글자부터 기록해 두고, 이튿날 아침에 재령으로 관문(關文, 조선조 때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으로 보내는 공문)을 보내어 유동에 사는 안세원을 즉시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안세원이 해주로 재빨리 압송되어 왔다. 재령 군수가 안세원이 혹 범죄인이 아닌가 의심하여 신속하게 압송한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연 식구 백여 명이 아사 직전에 있음이 확실하므로 감사 민유중은 그에게 쌀 50곡(斛, 50곡은 15~20말)을 주었다. 안씨는 그 쌀 때문에 식구 백 명의 목숨도 건지고 조상의 제사도 지낼 수 있었다. 이때부터 안씨 집안은 특이한 식사 의식이 생겨났다. 즉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제일 어른이 이렇게 묻는다.

“이 밥 누가 주었지?”

그러면 모든 식구들은 한꺼번에 대답한다.

“민대야(閔大爺)! 민대야!”

이렇게 소리친 뒤에 밥을 먹는 의식이 생겨나서 자손 대대로 가법으로 전해졌다.

민유중이 효종 때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특별보직 되었을 때의 일이다. 민공이 북병사(北兵使)에게 문안을 하루도 빼지 않았다. 북병사는 그만두기를 간절히 청했지만 민공의 문안은 하루도 거르지 않자 북병사는 다른 수를 썼다. 자기의 첩을 시켜 하루도 빼지 않고 정성껏 술상을 차리도록 하였다. 미안한 쪽은 이제 민공이었다. 술상 차리는 일을 제발 그만두라고 사정하니 북병사는 다음과 같이 응수하였다.

“판관이 내 청을 들어주지 않는데 내가 왜 판관의 청을 들어줍니까?”

판관은 하는 수 없이 매일 새벽에 하던 문안을 격일제로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곳 북쪽지방의 한 미담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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