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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당굿의 진행과 내용

삼신당굿은 3년에 한 번 크게 여는 고창굿과 당제로 나누어볼 수 있다. 마을주민들의 표현에 의하면 해마다 여는 삼신당굿 가운데 놀이패가 나오고 여러 곳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난장을 벌이는 큰 굿을 고창굿이라 한다.

① 고창굿의 진행과 내용

고창굿은 대개 음력 3~4월의 길일을 택해 열린다. 제비(祭費)는 마을사람들이 염출하여 소머리나 통돼지 등을 장만하여, 삼신당에 모셔진 산신, 성황부부, 용왕신께 당제(고사)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당제에는 금사면의 유지들과 동리의 연장자가 초헌관(初獻官)과 아헌관(亞獻官), 경헌(經獻), 집사(執事)를 맡는다. 당제의 순서는 초헌, 아헌, 경헌을 마친 후 축문을 읽고 소지를 올린다. 축문의 내용은 마을의 농사풍년과 상인들의 장사가 번창하기를 빌며, 마을의 발전을 비는 내용으로 해마다 다시 쓴다.

당제를 마치면 무당들의 축원이 시작되는데, 놀이패에 의한 각종 볼거리 외에 난장이 들어서서 흥겨운 분위기 속에 약 1주일 가량 계속되었다. 현재 고창굿에서 벌어지는 무당의 축원굿은 2일간만 치르고 있다. 이포마을도 젊은 사람들이 거의 없고 경비마련이나 바쁜 농사일 때문에 며칠씩 시간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제를 지낸 후 일 주일(현재는 2일) 정도의 축원굿이 끝나는 3일째는 마을 앞의 강에서 강고사를 지낸다.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많은 물자가 옮겨다녔던 이 길목은 강원도나 서울로 다니는 사람들 외에도 마을사람들도 많이 이용하던 나루였다. 이포의 장날은 1일장이었는데 인근에서 이포의 장이 가장 컸기 때문에 나루를 이용해 장사꾼들도 찾아오고 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포사람들도 양평장이나 여주장에 물건을 팔러갈 때면 이 나루에서 뱃길을 이용해 물건을 팔러다니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다녔던 만큼 사고도 많았다. 거대한 뗏목끼리 부딪쳐 사고가 나는 일도 많았고, 배에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는 경우도 생겨 강에 고사를 지내는 용왕제는 고창굿의 중요한 절차였다.

용왕제는 고창굿에 온 무당들이 제주가 되어 간단한 제물을 준비해 강에 내려가 배를 타고 진행하였다. 용왕신께 배의 안전과 마을의 평안을 비는 의미에서 간단하게 축원을 하는 형태였다.

고창굿을 하지 않는 해에는 당제라 하여 제물을 간단히 준비하여 고사형식으로 올린다. 고창굿을 3년에 한 번씩 올리는 이유에 대해 마을주민들은 가장 먼저 경제적인 사정을 꼽고 있다. 고창굿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매년 열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고창이 드는 해의 삼신당굿이 열릴 때면 현재 삼신당공원으로 조성된 산에 인근에서 몰려든 구경꾼과 상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삼현육각을 잡혀 유가를 돌고, 남사당패를 불러 줄타기나 풍물 등 다양한 볼거리들이 많았다. 또 이때는 삼신당굿이 일주일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에 여주나 이포사람들뿐 아니라 양평이나 이천 등지에서도 구경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앞서 살핀 것과 같이 삼신당굿의 기원과 관련된 다양한 설화와 명칭과는 별개로 삼신당굿 가운데 고창이 드는 해에 펼쳐지는 다양한 굿과 볼거리는 이포마을의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적 활동이 삼신당굿에 일정한 역할을 해왔음을 볼 수 있다. 이포나루는 조선시대부터 세곡과 물화를 싣고 다니던 큰 나루였다.

그러니까 이제 서울지주들이 쌀 올라가는 것 있잖아요. 쌀. 가을에 쌀 받아서 올라가는 게 우리 흔암리하고 저 이포나루하고 두 군데. 딴 데도 있었지만 이포하고 여기가 제일 아니에요? 여기서 나가는 배가 그 돛단배가, 돛단배들 아마 구경들 못했을걸.1)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강원도서 오는 뗏목이 엄청나게 많었지. 어떨 때 보면 뗏목이 부딪쳐서 사고 나는 일도 많었어. 뗏목이 오면 이포 여기서 묵었는데, 흔암리보다 여기가 더 컸지.2)

많구 말구요. 술집은 어려서, 우리 어려서 술집 두 집 세 집 있었는데, 좌우간 서울 한번 그날 그이 저 안성서 올라온 쌀이건 평택서 올라온 쌀이건 한번 뜰려고 하면은 소를 세 마리씩 잡았어요. 사토에서, 동네에서, 술집에서 잡는 거지요. 술집에서. 뗏목하고 배하고 엄청났어요. 지금 그거 그전에 지금같이 영사기가 있어서 찍어놓으면 사진 찍어놓았으면 참 볼 만했을 텐데, 떼배가 아마 한 100m쯤 뻗쳤을걸요. 저기서 저 밑에까지 뻗치면. 엄청나지요. 떼배가 엄청 있었어요.3)

이포주민들의 이러한 구술자료를 통해 나루로서의 이포의 역할과 규모는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다. 천령은 남한강의 수운이 정선, 평창, 영월, 충주, 문막, 여주를 지나 천령을 거쳐 양평과 서울로 연결되는 중요한 연결지점이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 각처의 산물을 이곳에 모이게 하고, 서울을 왕래하는 각처의 사람들과 배가 이곳을 거치거나 묵어가게 하였으므로 돈과 물자가 모여드는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 외에도 금사면은 옛날부터 금이 많이 나는 곳으로 알려져왔다. 남한강변에서 많은 사금이 채취되기도 했지만, 이포리 인근에 있는 윗범실마을은 전국에서 3대 금광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 윗범실에 있었던 금광은 일제시대부터 채광을 시작했는데, 1967년 폐광될 때까지 많은 양의 금을 채광하였다. 윗범실에 있었던 금광으로 인해 이포에도 금광일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 더욱 번성을 이루었다.4)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상업중심지로의 이포와 삼신당굿은 경기도의 도당굿 중에서도 부여 인근 저산 팔읍의 모시가 한데 모이는 장터로서 충청남도 부여 은산별신굿5)이나 물길이 살아 있을 당시 남한강가의 목계장터에서 열렸던 목계별신굿, 서울의 송파나루나 광나루에서 열렸던 굿 등과 같은 별신굿의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별신굿은 일정한 조건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지역의 치소(治所)로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거나, 중요한 교통로에 입지하고 있어서 큰 장시(場市)가 형성된 곳, 물산이 대단히 풍부한 곳 등의 조건을 갖춘 곳에서만 벌어졌다.6) 이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이포의 삼신당굿도 농업만을 기반으로 삼던 정도의 경제수준에서 외지의 놀이패까지 불러 놀이판과 굿판이 어우러진 고창굿을 일 주일씩 진행하였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고창굿은 2002년에 있었다. 2002년의 고창굿은 주무(主巫)인 임춘수가 맡았고, 2002년 5월 7일부터 10일까지 4일 동안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첫째날인 5월 7일에는 부정풀이와 당주굿, 제물진설 등이 진행되었는데, 당주굿은 먼젓번에 당주를 맡았던 장석환과 2002년에 당주를 맡은 최상렬의 집으로 가서 진행하였다. 이러한 첫쨋날의 절차 가운데 부정풀이는 굿을 여는 제장인 삼신당 주변을 깨끗하게 정화하여 신령님들이 찾아오시도록 온갖 부정을 물리치는 정화의례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본격적인 굿을 하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당주굿은 대개 경기도 도당굿의 절차에서 도당굿의 제관을 맡은 사람의 집에서 하는 굿으로, 제관을 맡은 사람의 집에는 황토를 펴고 금줄을 매서 신성한 공간임을 알린다. 일반적으로 마을제사에서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부부지간에 잠자리를 하지 않고, 부정을 탈 만한 음식과 행동을 가리는 금기를 지킨다. 이포의 삼신당굿에 뽑히는 제관도 엄격한 금기를 지켜왔으나 최근에는 아주 엄격하게 하지는 않는 편이라 한다. 당주굿은 마을이 잘되기 위한 고사와 덕담 및 당주댁의 안녕을 비는 절차이다.

본격적인 굿이 진행되는 둘쨋날은 부정풀이와 함께 마을주민들이 참여하여 올리는 당제(고사)와 제석·불사·칠성거리 및 산신도당굿, 호구별상굿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굿이 진행되는 동안 부대행사로서 사물놀이와 광대줄타기, 경기민요 무형문화재 제57호 이수자이자 경기도립국악단 최은호와 이영란의 국악공연이 이루어졌다.

둘쨋날의 부정풀이는 굿을 여는 삼신당 주변을 정화하고, 삼신당의 신령과 남한강의 용신에게 굿을 열어 정성을 표하는 것임을 알리는 절차이다. 당제는 마을사람들이 치르는 유교식 제사로,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을 당주인 최상렬과 여주지역의 유지인 여주경찰서장과 농협군지부장 등이 맡아지냈다.

둘쨋날에 이루어진 중요한 굿거리의 절차 가운데 하나는 산신도당을 모셔오는 거리이다. 삼신당굿에서 도당이 깃들어 있는 곳은 삼신당의 오른쪽 뒤편 쪽에 있는 당나무이다. 현재 이 당나무는 지난 여름 가지 한 쪽이 부러져 잘린 상태이다. 도당신을 모시는 절차는 이 당나무에 깃들어 있는 도당신을 굿이 열리는 제장으로 모셔오는 의미를 가진다.

셋쨋날은 신장거리, 대감거리, 도당군웅굿, 선녀동자, 성주거리, 조상거리, 창부거리, 선왕뒷풀이 등의 거리와 광대줄타기와 사물놀이, 국악공연 등의 공연이 있었다. 본래 경기도 도당굿에서는 굿의 거리중간에 화랭이들에 의한 일종의 놀이성 공연이 이루어졌다. 이것을 터벌림이라 하는데 이것은 굿의 특별한 제차라기보다는 재담과 장기에 뛰어난 화랭이들만이 참가하는 일종의 놀이이다. 현재 활동 중인 조한춘에 따르면 터벌림이 굿이 아닌 놀이로, 장내정리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였다. 예전에 터벌림을 했던 이유는 굿이 한창 무르익어 굿청 안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면 굿판이 좁아서 굿판을 넓히기 위해 짚북덕이나 흙을 끼얹으며 좁게 몰려든 사람을 물러서게 하기 위한 절차였다. 그래서 넓혀진 굿청에서 땅재주도 넘고 방석화랭이가 나와서 어릿광대짓을 하며 굿청에 활기를 불어넣었다.7) 그러나 이러한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는 화랭이들의 맥이 끊어져 터벌림에서의 화랭이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2002년에 치른 여주의 삼신당굿에서는 터벌림과 같은 일종의 오락성 제차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서울굿의 제차들이 많이 보이는데, 주무인 임춘수에 의하면 지역간의 이동이 편리해지고 문화가 섞이면서 굿의 지역성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여주의 삼신당굿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서울굿의 거리들은 현재 주무인 임춘수 이전에 삼신당굿을 맡았던 무당들이 활동했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면 비교적 오래 전부터 서울굿이 여주 삼신당굿의 절차에 영향을 미쳤던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날인 5월 10일에는 옛 이포나루가 있었던 곳에서 마을사람들이 미리 제작한 뗏목을 타고 삼신당의 아랫편 은행나무가 있는 곳으로 뗏목을 띄우면서 중에 용궁제가 진행되었고, 부대행사로 사물놀이 공연이 이루어졌다.

② 당제의 진행과 내용

‘고창이 들지 않는 해’에 올리는 것을 당제라 한다. 2004년에는 군에서 삼신당을 신축하도록 예산을 배정하여 주었으므로 예년의 당제보다는 조금 더 크게 지냈다.

당제는 오전 10시경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제물을 장만한 마을사람들이 삼신당 공원으로 제물을 옮겨오고, 삼신당굿의 주무인 임춘수가 이 제물을 진설하였다. 제물은 삼신당의 신령들을 모신 당 안에 설치된 제단과 삼신당 제당 앞, 제당 옆 등 총 3곳이다. 이 가운데 삼신당 당 앞에 차린 제물은 제를 올리게 됨을 고하고 여러 신을 청하는 절차를 위해 차린 것이며, 당 옆에 차린 제물은 삼신당 뒤편의 서낭과 무당을 보호하는 대신을 위한 제물이다.

제물이 진설된 후에는 시루떡과 웃기를 막대기에 꽂아 삼신당 건물의 네 귀퉁이에 꽂아 두는 꽂이떡과 떡시루 위에 꽂을 서리화를 만들어 꽂았다. 꽂이떡은 부정을 치기 전에 꽂아놓는데, 잡귀들을 위해 마련하는 제물로 부정을 물리친 후 이 떡을 빼서 먹으면 재수가 좋다고 한다. 그 밖에도 당제의 마지막 절차에 여러 신령들이 정성을 잘 받았는지 확인하는 의미로 하는 고풀이를 위해 광목으로 12개의 고를 만들어 준비해두었다.

제물진설과 당제의 준비가 끝나자 주무인 임춘수가 삼신당 안의 부정을 물리고 신당 앞에 차려진 제물 앞에서 약 1시간가량 부정굿을 진행하였다.

이어서 마을사람들 가운데 올해의 당주로 뽑힌 박재광과 마을 이장, 금사면 면장, 여주군 의원 등이 참가해 고사를 지냈다. 고사는 헌작, 재배, 독축, 재배, 소지의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축문은 당주인 박재광이 읽었다.

2004년의 축문은 당주로 뽑힌 박재광이 준비하였는데, 삼신당을 새로 짓게 되는 내용과 잘 진행되기를 바라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삼신축

갑신년 윤이월 이십육일 마을대표 이장께서 오지지신께 감히 고하나이다. 이제 삼신각 새건축을 마을주민들께서 합동하여 삼신을 모실 신축을 세우고자 합니다. 삼신께서 보우하셔서 뒤후 어려운 일이 없도록 보삼과 주과를 올려 삼신당신께 음향(흠향)하소서.

동리 주민 일동

유교식 고사절차가 마쳐진 후 임춘수가 삼신당 안에서 약 1시간가량 축원을 진행한 후, 도당과 대신을 위해 삼신당 옆에 차린 제물 앞에서 축원을 계속했다. 이 절차에서는 마을 주민 가운데 집에서 가져온 꽃반을 올린 후 한 해 동안 가정의 평안과 무사를 비는 사례도 있었다. 한편 이 절차에서는 마을사람들을 상대로 한 해 동안의 운세를 보아 지켜야 할 일을 공수로 내리기도 하였다. 이 절차의 마지막에는 제물로 차린 쇠머리, 소의 앞다리, 뒷다리 순으로 사슬을 세워 초대되었던 신령들이 정성에 만족하고 마을을 평안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확인하는 순서가 이어졌다.

당제의 마지막 절차로는 서낭이 깃들어 있는 곳에 가서 돼지머리로 사슬을 세우며, 지난해 마을사람들의 정성이 부족하여 나뭇가지 한 개가 부러진 것에 대해 너무 노여워하지 말고 마을을 잘 보살펴달라는 당부를 하였다.

이어 삼신당의 신축을 위해 삼신당 앞에 있는 정자 한 켠을 막아 삼신당에 모셨던 무신도와 무구 등을 옮기는 작업이 이어졌다. 모두 옮기고 난 이후에는 삼신당 무신도를 옮긴 임시 제당 안에 제물을 차리고 삼신당을 새로 마련하니 새로 짓는 당이 잘 지어지도록 간단한 축원이 이어졌다.

이러한 2004년의 당제는 삼신당을 새로 짓는다는 것이 계기가 되어 유교식 고사 외에 축원의 내용과 절차가 더 많이 들어가게 된 것이 평상시와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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