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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설화의 내용 검토

이상과 같이 이포리 삼신당굿의 기원과 관련한 설화는 다양한 등장인물과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 설화의 내용 가운데 주된 인물은 천령 최씨의 시조와 나옹과 자초(무학대사), 계룡산 삼신, 고려 귀신 등으로, 그 가운데 상대적으로 비중이 높은 등장인물은 천령 최씨와 나옹, 무학대사(자초)이다.

설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삼신당굿의 기원과 흐름을 살펴볼 때 천령 최씨들에 의해 마을이 생긴 것이 고려시대까지 올라가고, 설화의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나옹의 경우 고려시대 승려인 것으로 보아 삼신당굿의 시작을 최소한 고려시대까지로 올려잡아 볼 수 있는 긴 시간적 흐름이 있다는 점은 많은 주의를 요한다. 실제 삼신당굿의 연원이 그리 오랜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치더라도 삼신당굿의 형태를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마을굿 모습으로만 고정시켜 볼 수는 없다. 오랜 동안 삼신당굿이 마을굿의 기능을 하며 존재해오는 동안 현재의 삼신당굿과 같은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생업의 변화나 마을의 사정에 의해 충분히 다양하게 변했을 것이다. 최소한 일 주일씩이나 굿을 열고 외지의 놀이패를 불러 큰 굿판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이포가 나루로서 번성한 상태의 경제적 기반을 반영하나, 마을이 생긴 처음에는 아마도 소박한 형태였을 것이다. 결국 삼신당굿을 마을의 설촌(設村)과 연관지어 이포의 역사적, 문화적 변천과 연관지어 살필 필요가 있다.

① 천령 최씨 관련 설화

이 가운데 천령 최씨는 천양이라 불리는 이포에서 마을을 세운 입향조이다. 삼신당의 명칭과 관련해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천령 최씨 집안에서 자신들의 시조신을 모신 것으로 주장하면서 삼선당(三僊堂)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다.

관련 설화들 가운데 천령 최씨의 시조와 관련한 설화의 내용을 보면 천령 최씨가 무학대사에게 베푼 공덕으로 명당을 얻게 되고, 이로 인해 마을사람들은 재앙과 질병을 막아주어 마을을 번창하게 해준 것을 오직 이 명당에 묘를 쓴 최씨의 시조 덕이라 생각하고,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설화의 중요한 뼈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설화의 중요내용을 통해 설령 무학대사에게 공덕을 베푼 천령 최씨의 시조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고 하더라도 왜 수호신이 숫자 3의 의미가 포함된 삼선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내용이 설화상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천령 최씨의 시조신을 삼선으로 삼아 모셨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번성하였던 천령 최씨 집안이 물 수(水)자가 들어간 사람을 들여 천령 최씨의 집안이 기울고 대신 남양 홍씨 집안이 번성하게 되었다(설화 ⑤)는 내용을 보면 천령 최씨 집안이 번성하던 이미 당시 삼신당에 대한 의례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마을의 입향조였던 최씨 집안을 대체해 남양 홍씨 집안이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보면 삼신당에 관련한 천령 최씨의 내용은 천령 최씨 집안의 시조 자체를 모셨다기 보다는 마을을 세웠던 초기에 천령 최씨 집안이 중심이 되어 삼신당에 대한 의례를 전승해 왔을 가능성과 최씨 집안에서 주관하던 의례가 남양홍씨 집안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② 나옹과 무학대사 관련 설화

설화의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가 나옹과 자초(무학대사)이다. 여주의 이포지역에 등장하는 나옹과 무학대사는 고려 말 나옹선사가 양주 회암사에서 밀양의 영원사로 이동하고자 할 때 이포에서 배를 구했다는 내용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이 설화의 내용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포의 지정학적 위치와 양주 회암사와 관련된 내용1)이다.

원나라의 전성기였던 1300년대 동남아시아 여러 곳에서 불교를 포교한 인도의 승려 지공은 1326년 3월 고려의 개경에 도착하였다. 고려에 머물면서 지공은 양주의 회암사를 들러보고 인도에서 자신이 공부했던 나란다사와 유사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수제자인 나옹에게 회암사를 중창하도록 하였다. 나옹은 고려의 승려로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렀고, 그 절반인 5년 동안 지공의 곁에서 수학하고 보좌하였다. 원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지공은 나옹에게 고려로 돌아가 회암사를 나란다사의 후신으로 확장하도록 부탁하였고, 나옹은 고려 말의 내우외환과 재정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회암사를 조선 전기 최대사찰 기반이 되도록 중창하였다. 이 회암사를 거쳐간 승려는 나옹을 비롯하여 환암 혼수, 무학 자초, 천봉 만우 등의 고승이다. 이 가운데 무학 자초와 나옹, 지공을 삼대화상이라 하는데, 이 삼대 화상은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에서 높이 숭앙되는 대표적 고승이다.

조선의 건국 후 태조는 즉위 후 몇 달 만에 처음 맞이하는 생일에 자초(무학대사)를 왕사로 책봉하였다. 건국 후에 베풀던 왕실의 중요한 몇 가지 불교제전이 폐지되고, 한성천도 후에는 개경의 사원이 위축되는 현상에도 불구하고 회암사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왕사였던 자초는 건국 다음해부터 회암사의 주지를 맡았고, 태조는 자주 왕사를 찾아갔으며, 내신을 보내어 문안과 함께 사물(賜物)이 있었다. 왕실의 정변과 액상(厄喪)이 잇따랐으므로, 이를 물리치고 안녕을 갈구하는 불사가 이곳에서 시행되었다. 자초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태조의 참모로서, 회암사의 주지와 감주(監主)를 역임하였다. 조선 초 나옹의 대표적 문도였던 혼수(混修)가 급서하자, 자초는 그가 누렸던 지공과 나옹의 후광을 계승하여 조계종을 대표하는 존재로 부각하였다. 회암사는 조선이 서울로 천도한 다음에 그 위치의 중요성이 증대되었고, 자초가 이곳에서 태상왕과 상왕을 저울질하면서, 불교의 유지에 이용하였다. 자초는 왕사로서, 불교계의 주도권을 쥐고, 회암사에서 국가적 차원의 후원을 받았다.

그 밖에도 조선시대에 국가적 차원에서 회암사는 국가를 위한 의식을 개최하는 장소였고, 수륙회를 개최한 진관사(津寬寺) 등 몇몇 사원과 함께 예외적인 특별한 우대를 받았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졌다. 국가적 차원의 의식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국가재정에서 때에 따라 지원되었음은 물론이고, 이러한 국가적 지원은 사원의 비용과 품격에 절대적인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의식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지원이 잇따랐다. 더욱이 고려의 수도인 개경이나 조선의 수도인 한성에서 가까운 위치와 무엇보다 생불(生弗)인 나옹과 그의 후광을 업고 태조의 왕사였던 자초가 주지였다는 기반을 갖추었으므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왕과 왕비의 상제례가 이곳에서 빼놓지 않고 진행되었다.

이와 같이 양주의 회암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인물들이 이포의 삼신당굿에 나타나고 있는 점은 나루로서의 이포의 지정학적 위치와 연관지어 볼 수 있다. 국가적 위호 아래 각종 불교의식을 위한 물자나 사람들의 이동과 지공과 무학과 같은 인물이 이포나루를 거쳐 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는 설화의 내용을 통한 가능성의 유추 수준이며, 양주 회암사와 관계된 등장인물들, 이포리의 지정학적 위치 등으로 보아 회암사와 관련한 고려와 조선의 불교에 관한 내용들을 검토한 후 살필 필요가 있다.

‘설화 ③’의 계룡산 산신과 관련된 내용도 마을에 질병이 심해졌을 때 마을 촌장에게 현몽하여 계룡산 산신을 언급한 것이 무학대사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설화의 중요한 내용은 계룡산에서 세 노인을 만나 마을의 질병을 고치고 삼신을 모시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주요 골자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촌장에게 현몽한 인물이 무학대사였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불교에서 모시는 신령을 모셔 마을의 질병을 치료하라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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