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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설화

금사면 이포리 삼선당굿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의 관련설화를 찾아볼 수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천령 최씨 시조묘와 무학대사 관련 설화1)

『여주군지』에는 무학대사와 관련한 설화를 소개하고 있다. 옛날 이 마을에는 최씨 일가가 외롭게 살고 있었는데, 부자가 낡은 배 한 척으로 남의 짐을 운반하여 그 품삯으로 생활해왔다. 하루는 서울까지 짐을 운반하고 돌아오려는데, 한 도승이 여주까지만 태워다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최씨 부자는 자기 집의 배가 닻도 없고 낡아서 느려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 속력이 빠른 다른 배를 타라고 했다. 그러나 불교의 탄압이 심하고 승려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때였으므로, 모두에게 거절당했다. 배를 타지 못하는 도승의 사정도 딱하였고, 도승은 천천히 가도 좋으니 제발 태워만 달라고 간청하여, 배에 승려를 태우고 여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돛도 없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배가 쏜살같이 달려서 먼저 떠난 다른 배를 앞서갔다. 이상하게 여겨 배의 양 옆을 보니, 용 두 마리가 양쪽에서 배를 끌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때마침 점심때가 되어 배에서 잡은 고기로 생선국을 끓이게 되었는데, 최씨 부자는 도승을 시험하기 위하여 고의로 생선국을 대접했다. 그러나 도승은 주는 생선국을 아무 말 없이 달게 먹어 “스님도 고기를 잡수십니까”하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도승은 “누가 고기를 먹었느냐? 나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내가 대변을 볼 터이니 보아라” 하면서 배의 고물에 가서 대변을 보았다. 그러자 대변이 물고기로 변하여 물에 떨어져 갔다. 최씨 부자는 이 모습을 보고 이 도승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극진하게 대접하여 이포에까지 오게 되었다. 이포까지 온 도승은 “내가 신륵사까지 갔다가 오는 길에 다시 들리겠다” 하고 사라졌다. 최씨 부자가 태워다주었던 대사는 무학대사였으며, 동자(빠가사리의 지역어)의 배가 노란 것은 무학대사의 대변 빛깔이 옮아서 노랗다고 한다.

얼마 후 도승은 돌아가는 길에 이포에 들려 최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때 최씨는 부친상을 당하여 있었다. 최씨가 상중인 것을 보고 “상을 당한 것 같은데 모실 묘자리는 잡았는가” 하고 물었다. 갑자기 상을 당하여 아직 묘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답하자 자기가 묘자리를 하나 잡아줄 터이니 여기에 묘를 쓰되 장차 이 묘 앞으로 길이 날 것인즉 이 길에서 철마가 달리거나 소·말발굽 소리가 나면 너희 자손들은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렇게 하여 무학대사가 잡아준 것이 천령 최씨의 시조를 모신 지금의 묏자리이다.

무학대사가 잡아준 이곳에 묘를 쓴 후 인가가 늘어 마을이 형성되고 번창하였다. 아무리 무서운 전염병도 이 마을만은 침범치를 못했으며, 이 마을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재앙과 질병을 막아주어 마을을 번창하게 해준 것을 오직 이 명당에 묘를 쓴 최씨의 시조덕이라 생각하고, 자연히 이 묘지를 신성시하고 숭배하게 되어 주민들은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금사면 사무소 맞은편 약 300m쯤 거리에 약 150m 정도 높이의 야산이 있다. 이 산의 동쪽 벼랑 밑으로는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고, 서북쪽으로는 인가가 밀집해 있다. 이 산의 북쪽 산록에는 봉분 둘레 약 15m 정도의 잘 손질된 묘소가 있는데, 이 묘가 바로 천령 최씨의 시조묘다.

한편 마을사람들은 이때 무학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삼신당 아랫편 은행나무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금사농협 앞에 서 있는 수령 500년의 나무도 무학대사의 지팡이가 자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나옹선사 관련 설화2)

『여주군지』에 소개된 또 하나의 설화는 나옹선사와 관련한 내용이다.

고려 말 나옹선사가 양주 회암사에서 밀양 영원사로 옮길 때 이포에 이르러 수로를 이용하고자 배를 구했다. 선주인 최씨가 나옹을 배에 태우고 강을 건널 때 바람처럼 질주하는데, 자세히 보니 청룡과 황룡이 배를 끌고 밀어서 배가 쏜살같이 질주하게 되었다.

이포에는 해가 저물면 모기가 극심해서 고통스러웠는데, 나옹이 이 모기를 제거하게 한 후 500년은 모기가 없었다고 한다. 나옹이 최씨의 수고에 감사해서 소원을 물으니 최씨는 자신이 묻힐 묘자리를 원했다. 나옹은 묘자리를 잡아주면서 여기게 묘를 쓰고 나서 차마(車馬)소리가 들리면 후손들은 이곳을 뜨게 될 것이라 예언하였다. 그 후 약 60년 전에 후손들은 모두 이포를 떠나고 묘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한편 나옹선사가 짚고 온 지팡이(공손수)를 강변에 꽂았는데, 그 은행나무는 아직도 살아 있다. 그 밖에 현재 금사농협 앞에 있는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도 이 은행나무를 심을 때 함께 심은 것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무학대사와 계룡산 삼신 설화3)

옛날에는 지금의 이포리를 중심으로 마마가 창궐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로는 집집마다 전염이 되어 많은 사람이 죽게 됐으며, 마을에 곡소리가 그치치 않았다. 마을에서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하루는 마을 촌장의 꿈에 무학대사가 나타나 “충청도 계룡산에 가면 초가집이 한 채 있는데, 그 초가집 안에 세 노인이 있을 것이니 그 노인들게 말씀드려라”고 일러주었다.

촌장이 꿈에서 깨어 며칠 뒤에 계룡산에 올라가보니 초가집이 한 채 있었고, 집 안에는 세 노인이 담소하고 있었다. 촌장은 무릎을 꿇고 마을이 처한 사정을 이야기하자, 세 노인이 가서 도와줄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이포로 왔다. 그 세 노인을 모신 이후에는 동리에 질병이 사라졌으며, 이 세 노인이 삼신이었다고 한다. 이후에 당을 짓고 세 분의 영정을 봉안했는데, 이 삼신당은 영험이 있어 일제 때 일본 경찰들이 와서 미신이라고 영정을 칼로 찢고 불태웠는데, 그들이 강을 다 건너가기도 전에 갑자기 풍랑이 몰아쳐 세 사람 다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한편 『금사면지』와 2002년도 삼신당굿의 팸플릿에는 이 설화와 관련하여 무학대사를 나옹으로 변이해 소개하고 있다.4)

고려귀신과 소복한 여인 설화5)

고려가 망하고 조선 건국시 고려귀신이 방랑하다가 이곳에 왔다. 소복한 세 여인이 근심스럽게 앉아 있어서 그 사연을 물어보았다. 소복한 세 여인들은 “최씨(천령 최씨 시조)가 우리의 집인 괴목(느티나무)을 베어버려 집을 잃고 그 원수를 갚을 날만 기다리는데 최씨 전성기라 기회만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고려의 귀신이 그들을 달래고, 천령 최씨를 찾아가 자신이 겪은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천령 최씨 집안에서는 당을 지어 세 여인의 안식처를 마련해주고, 위패를 모셨다. 이후 최씨가 당주가 되어 2년마다 무당들을 모아 굿을 한 이후로 마을이 번성하고 괴질이 사라졌다.

삼신당과 천령 최씨 집안 관련 설화6)

『금사면지』에는 삼신당과 관련한 천령 최씨 집안의 이야기가 또 하나의 설화로 등장하고 있다.

조선 초기 이포리의 수굿말에는 천령 최씨 집안이 대종대가(大宗大家)를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이 집 앞을 지나던 도사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혀를 차는 모습을 주인이 보게 되었다. 주인은 도사를 집 안으로 모셔 대문 앞에서 혀를 찬 이유에 대해 묻게 되었다. 망설이던 도사는 선대로부터 꼭 지키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없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어른들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로 물 수(水)자가 들어가는 사람을 집안에 들이지 말라고 한 이야기를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도승은 천령 최씨의 집의 터전이 돼지혈이라 물수자가 들어가는 성씨나 이름을 가진 사람이 집에 같이 살면 그 복이 떠내려간다는 의미를 일러 주고 갑자기 사라졌다. 그런데 주인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웃에 착실한 총각이 있어 머슴으로 두었는데, 그 총각의 성씨가 물 수자가 들어가는 남양 홍씨였다. 조상들이 일러준 말을 잊고 3년씩이나 그 총각을 머슴으로 두었던 것이다. 그 이후 삼신당의 복이 모두 남양 홍씨네로 흘러 천령 최씨집의 가세가 기울어 이곳을 떠났다. 대신 남양 홍씨네는 집안이 더욱 번성하여 삼정승이 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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