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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당

선무당이란 강신체험을 가지고 있지만 내림굿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거나 학습이 충분하지 않아 본격적인 굿을 할 수 없는 무당류를 말한다. 이들은 주로 간단한 비손 정도의 일을 할 수 있는 무당으로, 일이 있는 집에 가서 간단히 빌어주거나 간혹 산파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기존에 보고된 여주지역의 사례1)를 통해 선무당류의 입무와 의례내용 등에 대해 살펴보자.

① 입무계기

여주시 대신면 초현1리에 거주했던 훗고개할머니는 초현리에서 태어났고, 18세 때 서울로 시집을 가서 딸 2명과 아들 한 명 등 삼남매를 두었는데, 40세 이전에 남편이 사망하여 41세 때 혼자서 다시 이곳에 돌아왔다 한다. 어릴 적부터 가난하게 살아왔고, 결혼한 이후에도 몹시 어려운 생활을 했으며, 보고 당시에도 자식들과의 연락이나 보살핌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고하였다.

성무과정에 대해서는 본인은 신내림 같은 것을 부인하고 있으나 보고자에 의하면 초현리로 돌아오기 전인 40세 이전부터 신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 돌아와서 본인도 모르게 신기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 계기가 된 것은 41세 때 초현리에 돌아왔을 때라고 한다. 이때 군에 입대한 아들이 여러 해가 지나도 소식이 없고 돌아오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절에 다니는 시어머니가 “물이나 떠다놓고 절이나 해라, 고사를 지내려면 하얀시루(백설기떡)를 따로 해서 장독간에 갖다놓아라”고 해서 백설기를 쪄서 물 한 그릇과 같이 장독간에 갖다놓고 안방에도 떡을 갖다놓았는데, 갑자기 대가 잡고 싶어졌다 한다. 이것이 훗고개할머니가 이 동네에서 무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46세쯤에는 방안에 신당을 꾸몄다고 보고되었다.

② 무업의 형태

보고자는 훗고개할머니의 무업형태를 특이한 것으로 보았다. 정식으로 점상(占床)을 놓고 점을 쳐주는 것도 아니고, 정식 굿거리를 배워서 굿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인근의 우환이 있는 집에서 찾아오면 풀어주고, 산고가 있는 집에서 찾아오면 풀어준다고 하였다. 보고자는 훗고개할머니가 병고와 산고를 주대상으로 삼아 풀어주는 일을 하는데, 풀어주는 방법도 일정한 형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손님이 찾아오면 대개 치성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고작이며, 집에서 치성이 불가능한 극소수 사람만이 훗고개할머니가 직접 자기 신당에서 치성을 드려준다고 하는데, 치성방법은 자기도 모른다고 하며, 인근에서 산모가 출산할 때는 그 집에 가서 출산을 도와주고 산모와 아이를 위해 빌어주는 일을 해주었는데, 그것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 못 해준다고 한다.

③ 모시는 신령과 신당, 일상생활

보고내용에 의하면 훗고개할머니는 방 한편을 양쪽으로 약간 막아서 신당으로 꾸몄는데, 크기는 가로(방의 폭 길이)가 270cm, 세로가 96cm, 185cm 이다. 안에는 높이 72cm, 가로 92cm, 세로 60cm 정도의 제단이 뒷벽에 붙어 있는데, 앞과 양 옆은 색동 비단으로 둘렀고, 윗면은 적색 비닐로 덮었다. 제단 위에는 물그릇 둘과 쌀그릇 둘이 올려져 있으며, 그 양 끝에 촛대를 하나씩 세웠다. 뒷벽에는 한지에 열두 신의 이름을 붓으로 써서 붙여놓았다. 이 한지에 적힌 열두 신의 이름은 면에서 붓글씨를 잘 쓰는 사람한테 부탁하여 받았는데, 당시 신의 이름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술술 외워져 나왔다고 한다.

훗고개할머니가 모시는 신령은 금강산 신령님, 인왕산 신령님, 진병산 신령님, 삼각산 신령님, 삼불제석님, 사해용왕님, 동갑신장님, 십이신장님, 팔만신장님, 일월성관님, 북두칠성님, 관운장군님 등이다.

조사자에 의하면 훗고개 무당이 모시는 신 중에 장군신과 산신이 넷이나 되고, 일반적으로 강신무들이 많이 모시고 있는 삼불제석이나 용왕님, 칠성님, 일월성관님 등도 볼 수 있어 어떤 만신의 영향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 여러 번 다각적으로 물어보았으나 그러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간단한 강신체험 후에 학습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제대로 된 굿을 할 수 없는 선무당류의 사례에 속한다. 이러한 선무당류의 사례에는 간단한 비손 정도만을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위의 사례처럼 손님을 받아 강신체험을 통해 문제해결을 해주는 수준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강신체험만 있을 뿐 무당으로서 입문하는 내림굿을 거쳐 체계적인 학습과정을 통해 굿을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이나 무가 등에 대한 이해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앞서 살핀 내용에 의거하여 보면 여주지역도 경기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세습무들이 활동하던 지역이다. 이때 중요하게 거론되어야 할 점은 임춘수의 언급과 같이 과거 이 지역에 세습무들이 우세하게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혜구에 의한 1968년 경기 시나위 자료조사 당시 경기도 여주와 장호원의 세습무로 김광채, 김덕진, 김승환, 김창식, 백영수, 백점봉, 안황운 등 7명의 사례만 소개될 정도로 이미 1960년대 후반 이지역에서 활동했던 세습무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2)

그렇다면 세습무 외에 강신무들의 활동은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임춘수의 제보에 의하면 과거 여주지역은 세습무의 주무대로서, 강신무들이 들어와서 굿을 하거나 세습무라도 자기의 관할지역이 아닌 마을에 가서 굿을 하기 위해서는 미리 그 마을의 세습무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20년대 경기도 도당굿을 담당했던 화랭이들의 제보에 의하면 이미 당시에 화랭이와 강신무의 비율이 1 대 10 정도로 큰 차이를 나타냈다고 한다.3) 경기도지역의 화랭이와 미지들이 혼인관계로 맺어져 유지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해본다면, 여주지역의 상황도 수원이나 화성 등의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현재 여주지역에서 집안 대대로 세습되는 무당의 사례는 임춘수가 유일하다.

무당에 대한 사회적 편견 특히 세습무에 대한 편견이 심해 활발하게 활동하던 화랭이들과 미지의 전통은 점차 단절되었고, 그 숫자도 급격히 줄어들어 희소한 상태에 이른 것이다. 거기다가 임춘수의 제보에서도 드러나듯 각지역간의 원활한 교통과 교류는 각지방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특성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 서로 혼합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경기도지역의 무당들이 경기도지역 고유의 굿거리를 배우기보다는 오히려 서울 굿거리에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자연스럽게 서울 굿거리를 익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의례의 진행양상인 굿거리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쳐, 서울굿의 거리가 경기도의 도당굿 의례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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