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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세습무

① 입무 계기

한국무속을 강신무(降神巫)와 세습무(世襲巫)로 이분하는 기준으로 보면 세습무란 집안대대로 무업이 계승되는 경우를 말한다. 경기도지방에도 집안대대로 무업이 계승되어 남자들은 화랭이로, 여자들은 미지로 활동하는 여러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여주에서 태어난 임춘수는 세습무가계 출신이면서도 강신체험을 가지고 있는 무속인이다.

임춘수의 어머니는 이포 삼신당굿을 맡아 하던 주무였다. 임춘수에 의하면 어릴적 그의 집에는 다른 마을에서 이 마을로 굿을 하러 오는 무당들이 세습무였던 그의 어머니에게 먼저 들어와서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양상은 일반적으로 세습무의 활동이 두드러진 전남지방의 일부 사례보고를 통해 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무당의 단골판이 자손대대로 세습되기도 하고, 이사를 하는 경우 단골판이 매매되기도 하는 경우와 같은 것으로서, 단골판의 매매나 관할권은 현재 세습무의 주활동권인 남부지방에만 있던 것은 아니다. 경기도지역에서도 엄연하게 단골판이 있었고, 단골판은 다른 사람에게 떼어줄 수 있었다. 단골판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무당의 단골집에 가서 굿을 하게 되면 무당끼리 싸움이 나기도 했고, 그래서 어떤 무당이 다른 무당의 단골집에 가서 굿을 하기 위해서는 그 단골집 무당의 허락이 필요했다.1) 다만 중부지방에서는 대략 1970년대를 고비로 단골판의 개념이 희미해져서, 일정한 단골판을 전제로 한 무당의 활동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사례를 보면 무당이 봄과 가을로 자신이 활동하는 지역을 각 가정을 찾아다니며 곡식을 거두는 일이 있었다. 임춘수에 의하면 여주지역에서도 각 단골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보리 수확기에는 꽃맞이를 위해 보리 한두 되, 가을철 추수기에는 햇곡맞이를 위해 벼 한 말 정도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것을 “영등거둔다”고 하는데, 약 20년 전까지도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세습무 집안 태생인 임춘수의 입무계기를 살펴보면 집안 내력으로 인해 단순하게 세습되었다기보다는 강신적 특징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즉, 임춘수의 입무담(入巫談)에 의하면 6세때부터 밤에 잠을 잘 때면 장군이 나와 월두천금으로 죽이려 하는 꿈을 꾸었고, 그러다가 월두천금이 낮에도 보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밖에도 어렸을 적부터 무슨 말을 하면 그대로 들어맞는 적이 많아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도 많았고, 물지게를 지고 갈 때면 자신도 모르게 굿장단을 매기는 것처럼 물동이를 두두려 장단을 맞추는 일이 많았다.

사실 임춘수는 7살 때 모친상을 당하여 친척집에 얹혀살면서 아주 힘들게 살았고, 고생도 많이 했다. 17세 때부터는 무당이 되는 것이 싫어 교회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약 20세 무렵부터는 몸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결핵을 앓기도 하였다. 이 당시도 친척집에 살고 있었는데, 아픈 사람이 있는지 어떻게 알고 왔는지 한 중이 집으로 찾아와서 함께 절에 가지고 하였다. 고통이 심했던 임춘수는 집으로 찾아온 중을 따라 약 1주일간 절에 있다 내려와 다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신이 다시 지펴서 몸이 아픈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이후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산속에서 흰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책 한 권을 주었다. “학교에 다니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 글을 배우고, 연필도 없는데 뭘로 글을 쓰느냐”라고 묻자 “이걸 다 배우면 너의 한이 풀릴 것이다. 그리고 평생을 벌어먹고 살 것이라”고 했다. 그것을 다 보고 나니, 이번에는 할머니가 나타나 또 책 한 권을 주었다. 하지만 책을 다 보지 못하고 약 반쯤 보았을 때 할머니가 사라졌다. 그리고 자다가 무구인 징, 비녀, 엽전, 침, 부채 등을 캐왔다.

이렇게 현몽에 의해 책을 받아 공부를 하거나 무구를 찾아내는 일은 무당으로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제의인 굿과 깊은 연관이 있다. 실제로 굿의 진행에서 부채나 징이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며, 엽전은 점을 치는 도구이다. 점을 치는 일도 무당의 기능 중 중요한 하나로서, 점의 결과를 통해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앞일을 예측하고 처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침은 무당의 기능 중에 하나인 의료와 깊은 관련이 있다. 지금 새로 태어나는 무당들의 경우 의료와 관련된 기능을 거의 알지 못하지만, 나이 든 세대의 무당들의 경우 현몽에 의해 치료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으며, 실제로 무당의 여러 학습과정 중에는 치료와 관련한 내용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타나 책을 주면서 공부를 하라고 하는 현몽은 무당이 굿을 진행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굿 문서, 즉 무가의 학습과 관련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강신체험을 통해 무당이 되지만, 내림굿과 같은 무당의 입무단계 이후에는 끊임없이 무가를 학습해 자유자재로 무가를 구술할 수 있어야 한다. 굿을 진행하기 위한 무당 학습이 완전한 이후에야 선무당에서 비로소 완전한 무당이 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춘수의 현몽에서 “이것을 다 배우면 평생을 먹고살 것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문서(무가)의 학습을 제대로 마치면 굿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큰무당이 되어 많은 단골을 가지게 될 것이고, 결국 잘 불려서 평생동안 먹고살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임춘수는 이와 같이 어릴 때부터 심한 신병(神病)과 현몽에 의해 무당이 되어야 하는 운명 앞에서 무당이 되는 것이 싫어 많이 감추어두었다고 한다. 특히 세습무당의 경우 어린 아이들조차도 반말을 하며 하대를 할 정도로 많은 차별 속에서 살아왔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세습무에 대한 차별을 잘 알고 있었던 임춘수는 자신의 운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무당이 되지 않으면 계속 겪어야 할 신병의 고통과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당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내림굿을 받지 않고, 혼자 손뼉을 쳐서 신내림을 받았다고 한다.

강원도 문막에서 무업을 시작하여 여주, 이천을 거쳐 현재는 28년째 여주에 정착하여 무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문막에서 굿을 할 당시 굿 도중의 공수에서 “한양을 가자”라고 하는 공수가 자주 내려 한양에 더 가까운 고향 여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② 내림굿과 학습

내림굿은 부정을 치고 잡신(허신)을 떼어버린 후 올바른 신을 받는 중요한 과정이다. 용궁이나 장군이 말문을 열어주는 사람도 있으나, 임춘수는 본인이 직접 손뼉을 쳐서 산신, 칠성, 불사님을 들어오게 했다 한다. 내림굿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 잡신들을 제대로 떼어버리지 못하면 무당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요즘 새로 생겨나는 무당들의 경우 내림굿을 받아 잡신을 제대로 떼어내지 못하면 다시 내림굿을 받아야 하는데, 비용이 적잖게 들기 때문에 경제적 고통과 무병(巫病)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의 이중고로 고생하는 경우도 많다. 임춘수의 경우 내림굿의 절차가 뚜렷하지 않고 스스로 신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입무 초기에는 무업에 종사하게 된 것을 완전하게 수용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무업에 종사하면서도 무업을 하기 싫어해서 점점 말라들어가고, 십 리를 걸어가는데 하루종일 걸리는 일도 있었다 한다. 그뒤 무업에 성의를 다하여 무가(巫歌)를 배우고, 무업에 임하자 몸 상태는 나아졌다.

이후 여주시 흥천면 효지리에 자리를 잡아 살면서, 당시 이포의 삼신당굿을 주관하던 묘덕화 보살이라 불린 김순옥과 포초골 만신인 최주희 보살 등과 함께 이포의 삼신당굿에 참가하며 무당으로서 학습을 해나갔다.

앞서도 언급했듯 임춘수는 세습무 출신이면서도 강신체험을 가지고 있는 무속인이다. 임춘수와 같은 경우는 전라도지방의 세습무나 경기도 도당굿의 세습무인 화랭이와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우선 전라도지역의 세습무인 화랭이들은 굿의 진행에서 주로 반주를 하는 제한적 역할에 머물렀다. 이와 달리 경기도의 화랭이들은 마을굿에서의 참여와 역할이 폭넓었다. 마을굿의 구성을 전담해서 짜는 일도 화랭이들의 몫이었고, 화랭이들의 손에 의해 짜여진 마을굿의 제차들은 마을사람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2)

이에 비해 임춘수의 사례는 재담이나 예능활동으로 주목받아오던 세습무인 화랭이라기 보다는 강신무의 활동에 더 가깝다. 이는 임춘수가 입무하여 여주지역 보살들과 함께 삼신당굿을 하던 시기에 이미 화랭이와 미지가 짝이 되는 전통적 도당굿이 줄어들어 강신무에 의한 서울굿이 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세습무였던 부모를 일찍 잃은 탓에 가족문화 내에서 전통적인 경기도 도당굿을 학습할 기회가 없었던 것도 경기도지역의 전통적인 남무인 화랭이보다는 강신무로서의 활동에 치중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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