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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한국문화의 원류로서 주목을 받으며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연구하는 무속은 기본적으로 종교성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나, 연구자들의 관심은 무속의 본질적인 종교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겉으로 드러나는 무속의 양상을 기준으로 삼아 한강 이북의 강신무(降神巫)와 한강 이남의 세습무(世襲巫)로 나누어 분류하는 경향이 강해, 각 지역의 무속이 가진 지역적 특성이나 차이가 온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편이다.

이러한 강신무와 세습무의 이분법에 따르면 본고에서 다루게 될 여주지역의 무속은 강신체험만을 바탕으로 무업에 입무하거나 집안내력의 세습도 있지만, 동시에 강신체험을 통해 무당이 된 세습무, 그 밖에 소경·경(經)쟁이 혹은 법사(法師)라 불리는 독경무(讀經巫), 강신체험을 했으나 학습이 부족한 선무당류 등이 혼합되어 존재한 지역적 특성이 제대로 나타날 수 없다. 이와 같은 다양한 무속의 양상이 한강 이북의 강신무와 한강 이남의 세습무라는 도식적인 분류에 함몰되는 경우 본래의 모습이 묻히고 마는 것이다.

무속에서 경기지역은 마을굿의 일종인 도당굿(都堂)이 두드러진 지역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도당굿의 굿판은 대대로 무업(巫業)을 계승한 세습무인 ‘화랭이’(남자무당)와 ‘미지’(여자무당)가 이끌어왔다. 특히 화랭이는 어려서부터 굿을 보고 배우며 성장한 경우가 많아 굿판에서 재담이나 춤, 악기 연주 등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경기도 도당굿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나 국가의 문화재 지정 등의 활동으로 무속의 지역적 특성이 어느 정도는 밝혀지고, 나름대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경기도 도당굿을 해왔던 오수복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되어 무당으로서 자신의 개인적인 활동 외에 중요무형문화재로서 매년 발표회를 하고 있고, 그 밖에도 경기도 지역의 도당굿 무가(巫歌)나 현재 도당굿이 꾸준히 전승되고 있는 부천의 장말, 구리 갈매동 등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구와 사례보고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현재 도당굿이 전승되고 있는 지역인 부천·구리·시흥 등 일부 지역이나 현재 도당굿을 하고 있는 무당의 활동지역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형편이라 군(郡) 단위 정도에서 무속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물론 군 단위의 민속을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로 각 군에서 발행하는 군지(郡誌)가 있다. 군지의 편찬항목에는 무속도 필수적인 하나의 항목으로 자리잡혀 있다. 그러나 대개 그 지역을 대상으로 한 현지조사를 하여 조사내용을 바탕으로 하거나 그 지역에만 해당되는 내용을 위주로 다루기보다는 한국 전체의 민속이나 한국 무속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각 지역이 가진 무속의 특성이나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사례들은 드물었다.

군 단위 정도에서 무속의 사례나 의례의 내용들이 밝혀지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그 지역이 갖고 있는 특성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무속의 전체적인 틀이나 변화양상들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고에서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무속을 개관하면서, 여주지역 무속의 선행연구 검토, 현장조사를 통해 여주지역의 무속양상을 크게 무당, 의례, 무가, 굿당 등으로 살피고, 그것을 토대로 여주지역 무속의 지역적 특성 및 변화양상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기술하였듯 경기도지역은 대개 도당굿이라 불리던 마을굿이 전승되어왔다. 경기지역의 도당굿은 한강을 기준으로 한강 이북과 이남의 도당굿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으로알려져 왔다.1) 이에 따르면 한강 이북의 도당굿에서는 강신무가 주축을 이루는데, 그 가운데 서울 중심의 무속과 개성 중심의 무속이 두드러진다. 특히 개성은 강신무 무속이 압도적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한강 이북의 도당굿은 강신무의 의례가 중심되기 때문에 주목할 만한 예술적 가치는 한강 이남의 굿에 비해 떨어진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한강 이북의 굿에 비해 한강 이남에서 전승되는 도당굿의 굿판은 대대로 무업을 계승한 세습무인 화랭이(남자무당)와 미지(여지무당)가 이끌어간다. 이 가운데 세습무인 화랭이들은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무업(巫業)을 계승하는 남무들로, 어릴 때부터 무가와 기예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굿판에서 무가뿐 아니라 재담·춤·악기연주 등 뛰어난 재능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전승된 경기도 도당굿은 뛰어난 예술적 가치를 지닌 민속예능으로 주목받아왔다.2)

그러나 이와 같은 한강 이북의 강신무에 의한 도당굿과 한강 이남의 세습무에 의한 도당굿 전승에 대한 분류는 부분적으로 검토가 필요하다. 즉 한강 이남의 세습무라 해도 입무계기를 살펴보면 많은 경우 무당으로서 학습만을 통해 지위나 역할 등이 세습되기보다는 신병체험을 했던 사실이 있음이 드러난다. 경기도 남부지역을 대상으로 한 어느 조사결과에 따르면 세습무이기 때문에 신내림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화랭이패 무당의 경우에도 신내림을 경험하고 굿에서 공수를 주며, 자기의 신들을 모신 신당을 가지고 있다. 이는 경기 남부의 거의 모든 유형의 무당들이 입무과정에서 보편적으로 신내림을 경험하고 있음을 말해주며, 이는 강신무와 세습무로 무당의 유형을 구분하는 것이 이 지역 무속의 실태에 잘 들어맞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3) 이에 의하면 세습무의 경우도 강신무와 같이 신병체험을 한 후 무당이 되기 때문에 신병체험을 기준으로 강신무인가 세습무인가 하는 구분은 타당하지 않으며, 더 많은 지역연구와 사례연구를 통해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현재 경기도지역에서 도당굿이 마을굿의 형태를 지니며 온전하게 전승되어오는 사례는 드물다. 부천의 장말과 구리 갈매동 등 일부에서만 마을굿의 형태를 유지하는 형편이다. 대부분의 마을에서 도당굿은 소멸하거나 유교식의 마을제사로 그 형태가 바뀌었다. 경기도 도당굿의 한 보고자료4)에 의하면, 보고된 164개의 사례 가운데 약 60여 개가 도당굿에서 유교식 제의로 변화했음을 볼 수 있고, 전체 사례 가운데 무속식 도당굿에서 유교식 제의로 변한 비율은 약 30%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변화에 대해서는 무속식으로 하는 마을굿을 유지하는 것이 유교식에 비해 비용 면에서 훨씬 많이 든다는 점이 하나의 원인으로 제기되고 있다.5) 이러한 사정은 경기도지역의 여러 마을의 사례에서 두루 확인되는 바이다. 도당굿의 형태로 제의를 올릴 경우 굿을 주재하는 무당에 대한 사례비뿐 아니라 제물의 양도 유교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많기 때문에 비용 마련은 도당굿의 전승에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였다. 여주의 삼신당굿이 3년에 한 번씩 크게 굿을 하는 고창굿을 열고, 그 사이에는 간단한 고사로 대신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역시 비용 문제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여주지역에서는 도당굿을 흔히 고창굿이라 부른다. 무가계(巫家系) 집안 출신의 무녀와 혼인하여 화랭이로 활동했었던 안산(始興郡 秀岩面 下中里)의 우정원(禹正元, 1978년 보고 당시 66세)에 의하면 ‘고창굿’이라는 것은 ‘도당굿’ 과 같은 뜻의 말이다. 경기도에서도 김포, 시흥, 강화 등지에서는 도당굿이라 부르고, 광주, 여주, 이천군 등지에서는 고창굿이라 부른다고 했다. 이러한 굿에서는 흔히 난장판들이 벌어지고, 줄타기나 땅재주 같은 구경거리들이 있어서 남사당패와 화랑이패가 혼동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굿이 벌어지는 가운데 행해지는 놀이의 일종으로 굿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한다.6) 고창굿의 고창이란 난장판을 말하는 것이라는 또 다른 제보도 눈에 띈다.7) 이때에는 타지방 사람들까지 수백 명이 모여들고, 갖가지 행사들이 벌어졌다 한다.

고창굿의 어원과 관련해 이포 사람들의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포의 삼신당굿을 표현하는 말 중에 3년에 한 번씩 크게 여는 당제만을 ‘고창’이라 표현하고, 나머지는 당제나 고사 등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고창을 한다는 것”은 남사당패를 불러 놀이판이 벌어지고8) 줄타기나 재주 등을 보이며 여주 인근에서 모여든 갖가지 장사꾼들이 벌이는 난장판이 벌어지는 상태의 삼신당굿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본다면 고창굿의 ‘고창’을 난장판이라 한다는 것의 근거나 고창의 유래·어원 등에 대해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자료는 없지만, 대략 무당들의 굿과 함께 난장과 같이 여러 가지 볼거리를 제공하여 많은 사람을 모이게 했던 굿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여주지역의 마을굿 전승에 대한 내용은 주로 금사면 이포리의 삼신당굿9)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1989년 간행된 『여주군지(麗州郡誌)』에 따르면 여주군 능현리에서는 마을에 거주하던 만신이 정월 보름이 되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가내 안녕과 축원을 드렸다고 하고, 능서면 신지리에서도 음력 10월이 되면 동제를 지낸 후에 무당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축원을 드렸다고 한다. 그외에도 북내면 당우리에서도 무당이 축원했음이 보고되었다.

한편 강신무와 세습무의 구분과 관련하여 현재 여주지역은 주로 강신무들이 활동하고 있다. 주로 보살이라 불리며 점치는 것을 위주로 하는 강신무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며 활동하는 것은 여주지역만의 특징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거의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현재의 이런 사정과는 달리 1970년대 중반까지 세습무의 활동이 있었다. 그 중에는 봄과 가을로 보리와 벼 등 햇곡식을 거두어 햇곡맞이와 단풍맞이를 전승해오기도 했다. 위에 소개된 것처럼 여주시 능현동은 마을에 거주하던 만신이 정월 보름이 되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가내 안녕과 축원을 드렸다고 하고, 능서면 신지리에서도 음력 10월이 되면 동제를 지낸 후에 무당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축원을 드렸다는 사실은 세습무로서 자기 관할 지역을 담당하는 일종의 종교사제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위에 서술된 능현리와 신지리 두 사례의 경우, 서술된 내용만을 통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무당이 어떻게 집집마다 다니며 축원을 드리고 곡식을 거두었는지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정황상 무당들이 자기의 단골지역에서 곡식을 거두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렇게 집집마다 다니며 곡식을 거두는 것을 ‘거둠’혹은 ‘시줏돈’이라고 하는데, 경기도 도당굿 기능보유자인 오수복의 경우에도 옛날에는 거둠을 다녔으나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이후에는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10)

또 이러한 세습무들에게는 일정한 지역의 관할권이 있어서 외지의 무당이 와서 굿을 할 경우 그 지역의 큰무당인 세습무에게 굿을 하게 됨을 고하고 허락을 얻은 후 굿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신무의 숫자가 늘어나고 지역의 인구유동성이 커지면서 세습무가 주를 이루던 여주지역에서도 세습무의 숫자가 줄어들고 외지의 강신무들이 들어와 정착하게 되면서 세습무가 주축이 되었던 특성이 희미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 이포 삼신당굿의 굿거리에도 반영되고 있다. 즉 경기도지역의 화랭이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제보한 다른 지역의 굿거리와 비교해보면 많은 차이가 드러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 도당굿의 절차는 당주굿, 거리부정, 부정청배, 부정굿, 당맞이, 돌돌이, 장문잡기, 시루청배, 사루굿, 터벌림, 재석청배, 제석굿, 손굿, 군웅굿, 당할머니굿, 뒷전의 순서로 진행되는 반면 2002년의 여주 삼신당굿의 굿거리는 신장, 대감, 창부, 호구별상굿, 성주 등의 굿거리가 포함되어, 상대적으로 서울굿의 거리가 많이 포함된 편이다.

여주지역의 삼신당굿에 보이는 이러한 서울 굿거리 양상은 여주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이웃 이천지역의 경우에도 이천지방의 도당굿이 서울새남굿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서울에서 굿을 하는 무당들이 이천의 도당굿에 참가하고 있는 실정이다.11)

경기도 도당굿에 나타나는 이러한 서울굿의 양상은 전통적인 도당굿의 변질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보다는 변화양상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경기도 도당굿의 굿 내용이 서울굿의 양식으로 변화하게 된 것은 한 마을과 단골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도당굿을 행해왔던 무당들이 연로하거나 사망하여 무당 내에서 학습을 통해 전승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일부 사례를 제외한 대부분의 마을에서도 전승주체나 비용의 문제 등으로 도당굿의 맥이 이어져 내려오지 않아 굿을 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어졌고, 굿의 기회가 줄어드는 현실적인 사정은 무당들의 도당굿에 대한 학습동기나 전승욕구 등을 희미하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도당굿을 담당할 무당층이 얇아지자 서울 굿거리를 하는 무당들을 데려다 도당굿을 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이런 와중에 경기도 도당굿에 서울 굿거리가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었다. 또한 굿거리가 본질적으로 일종의 정형성을 띠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큰 융통성을 보이는 의례적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굿거리에서 나타나는 서울굿의 성격은 경기도 도당굿의 성격 변질보다는 변화 쪽으로 융통성 있게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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