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HOME 주제 민속 의식주 및 생업민속 생업민속 농업 공동 노동조직과... 두레

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두레

마을마다 공동노동조직인 두레가 있었고 농악대도 있었는데, 두레의 구성원은 곧 농악대의 구성원이었다. 그리고 각 마을의 농악대에는 두레패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농기가 있었다. 농기는 두레를 나타내는 상징물이기도 하면서 마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그래서 마을마다 농기를 상당히 중요시했는데, 과거에는 각 농기마다 정해진 서열이 있었다. 그 서열은 마을에 양반이 있느냐, 나이가 많은 이가 있느냐, 말 잘하는 이가 있느냐, 줄다리기에서 이겼느냐, 두레싸움에서 이겼느냐는 등에 따라 정해졌다. 그렇게 정해진 서열은 1년 동안 유효한데 서열이 낮은 농기는 서열이 높은 농기에 대해서 항상 만날 때마다 기세배를 먼저 해야 했다.

정초가 되면 각 마을마다 농기를 앞세운 농악대와 마을 사람들은 풍물을 치면서 길놀이를 하는 것으로 명절을 보내게 된다. 길놀이를 하면서 놀이가 벌어지는 논이나 밭 아니면 넓은 빈터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다가 다른 마을과 마주치게 되면 서로 기세배를 하고서 양쪽 마을의 농악대가 갖은 기량을 뽐내면서 마당놀이를 한다. 마당놀이가 끝나면 양쪽 마을은 농기를 적당한 위치에 세워두고 농기싸움을 할 사람들이 서로 움직이면서 서서히 놀이의 기운을 북돋운다. 각 마을에서는 사람들을 적당한 비율로 나누어 한쪽은 상대편을 공격하게 하고 나머지 한쪽은 자기 마을의 농기를 보호하도록 한다.

적당한 때가 되면 양쪽 마을의 싸움꾼들이 서로 밀치고 당기고 몸싸움을 하면서 공격할 사람은 공격을 하고 방어할 사람은 방어를 하게 된다. 그래서 상대편 농기의 꼭대기에 달려 있는 꿩장목을 먼저 떼어내면 이기게 된다. 아무리 바빠도 농기싸움이 벌어지면 만사 다 제쳐놓고 싸움에 참여했다는 것을 보면 매우 치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농기싸움이 끝나면 진 마을의 농기가 이긴 마을의 농기에 기세배를 하게 되고 양쪽 마을 모두가 하나가 되어 흥겹게 뒷풀이를 한다. 그리고 앞으로 1년 동안 농기 서로간의 서열이 정해지게 되는 것이다.

점동면의 두레싸움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1) 40~5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레싸움이 활발하였는데 제일 두레가 센 마을이 현수 1리 가마솜이고 그 다음이 모래실, 뇌곡리, 원부리, 덕평리 순서이다.

두레패들은 정월에 마을을 다니면서 걸립을 하는데, 이웃동네에 걸립을 가는 경우도 있다. 이때 북을 치면서 상대방 마을에 걸립을 하러 간다고 알린다. 그러면 상대방 마을에서는 북으로 대답을 하여 그 여부를 가르쳐주는데, 만약 아무런 반응이 없거나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두레패들 간에 싸움이 벌어진다. 이웃 마을로 들어온 두레패들은 기를 넘어뜨려 꿩장목을 쟁취하는 싸움을 벌인다.

농기싸움은 두레싸움이라고도 하는데, 대신면 후포리와 북내면 가정 2리에서 조사되었다.2) 두레싸움은 보통 정초 또는 모심기를 비롯하여 농기를 앞세우고 들에 나갈 때에 이웃마을의 농기와 마주치게 되면 기세배를 해야 하는데, 이때 서로 먼저 기세배를 하라고 하면서 싸움형식의 놀이가 이루어졌으나, 영농방식이 바뀌면서 점차 전승이 중단되고 말았다.

조선 후기 두레가 결성되어 활발하게 활동한 바탕에는 이앙법의 확산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3) 17세기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못자리에 씨앗을 키우지 않고 직접 논에 파종하여 수확할 때까지 재배하는 직파법이 사용되었다. 직파법은 묘목을 관리하거나 논에 이식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는 대신 병충해, 한해, 냉해 등으로부터 어린 모를 보호하기 어렵고 무엇보다 제초작업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또한 벼의 발아가 고르지 못해 수확량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앙법은 못자리를 만들어 묘목을 키워 논으로 옮기는 이식재배의 하나이다. 이앙법은 제초작업이 직파법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하고 수확량이 많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천수답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앙법은 실패의 확률이 매우 높은 농법이다. 모내기를 할 때 적당한 용수가 공급되지 않으면 한해 농사를 모두 망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앙법은 전국에서 행해졌고, 모내기, 김매기 등의 시기에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레의 출현은 공생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두레는 소멸의 길을 걷는다. 일제의 징병·징용제도 그리고 공동조직을 와해하려는 일련의 조치를 당하게 된다. 또한 한국전쟁을 통해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고 이후 이농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두레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무엇보다 두레 해체의 동기가 되는 것은 제초제의 사용과 농업의 기계화로 인해 모내기, 김매기, 추수 등의 농사 절차에서 사람의 노동력이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공동노동조직으로서 두레가 갖는 노동시장은 없어지게 되었다.

맨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