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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구 묘

□ 소재지 : 금사면 이포리
□ 시 대 : 조선

홍명구(1596~1637)는 인조대의 충신으로 본관은 남양, 자는 원노(元老), 호는 나재(懶齋)이다. 당녕군(唐寧君) 홍서익(洪瑞翼, 1572~1623)의 장남이자 영의정 홍명하(洪命夏, 1607~1667)의 형이다. 1619년(광해군 11) 알성문과에 장원하였으나 시골에 은거하다가 인조반정 후에 등용되어 1625년(인조 3) 부수찬이 되고 1627년 이조좌랑을 거쳐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35년(인조 13) 대사간·부제학을 거쳐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지키다가 적병이 이미 평양을 지났고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勤王兵) 2,000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다. 그리고 강원도 금화(金化)에 이르러 적의 대병을 만나 수백 명을 살상한 끝에 전사하였으나 선봉장 유림(柳琳)과 이일원(李一元)이 힘껏 싸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금화의 의열사(義烈祠)와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되었다.

묘는 이포리 뒷골마을의 북쪽 구릉에 조성된 남양홍씨세장지 내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22, 폭 158, 두께 29), 상석(높이 25, 폭 146, 두께 88), 향로석(높이 37, 폭 36, 두께 29), 망주석(높이 174, 폭 35, 두께 35)의 옛 석물이 단촐하게 갖추어져 있다. 고석 대신에 상석과 거의 동일한 규모의 판석을 받쳐 놓았으며, 문인석은 설치하지 않았다. 봉분의 우측에 1638년(인조 16) 건립한 방부개석 양식의 묘표(총 높이 209)는 마모가 심하여 그 좌측에 1981년 새로운 묘표를 세웠다.

한편, 마을 입구의 도로변에는 방부개석 양식의 홍명구 신도비(총 높이 약 346)가 서 있다. 푸른빛의 파도문이 감도는 아름다운 비신(높이 227, 폭 96, 두께 38)에 좌의정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지은 비문을 공조참□ (工曹參□ )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예서체(隸書體)로 글씨를 썼다. 곡운(谷雲) 김수증은 금석학(金石學) 연구에 정심(精深)하여 중국과 조선의 역대 금석(金石)과 선서(善書)에 밝고 팔분(八分)에 능해 당시 공사간의 많은 비석을 썼던 인물이다. 전액은 대사성 윤덕준(尹德駿, 1658~1717)이 “증영의정(贈領議政) 시충렬(諡忠烈) 남녕군(南寧君) 홍공(洪公)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 올려 비석의 종류가 신도비임을 파악할 수 있다. 비신 좌측에 새겨진 5행의 추기(追記)는 안동(安東)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근기(謹記)하고 손자인 홍득우(洪得禹, 1641~1700)가 근서(謹書)하였다. 전반적으로 마모가 진행되어 건립연대도 “…월(月) 일건(日建)”이라고만 확인되나 전후사정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묘 위로는 아버지 분병조참의(分兵曹參議) 홍서익(洪瑞翼)과 할아버지 익성군(益城君) 홍성민(洪聖民, 1536~1594)의 묘가 위치한다. 또한 주변에는 석물은 있지만 묘표가 없어 정확한 피장자를 알 수 없는 홍씨의 묘소가 여러 기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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