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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중 묘

□ 소재지 : 흥천면 계신리
□ 시 대 : 조선

한효중(1559~1628)은 인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 자는 경장(景張), 호는 석탄(石灘)이다. 문정공 한계희의 5세손이자 성균생원 한천뢰의 아들이다. 1590년(선조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을 거쳐 1605년 증광문과에 급제 후 교서관권지정자(校書館權知正字)를 지내고 서원현감(西原縣監)이 되었다. 또 예조정랑으로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때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이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당여(黨與)로 만들려 하였으나 불응하여 안악군수로 좌천되었다. 1622년(광해군 14) 동부승지에 승진, 토목의 남설 및 궁금(宮禁)의 문란을 극언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샀다. 인조반정 후 직언을 평가받아 공조참의를 거쳐 좌승지에 이르렀다.

묘는 계신리 신촌동 마을의 뒤쪽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12, 폭 91, 두께 46), 상석(높이 21, 폭 156, 두께 91), 고석(높이 31, 폭 35, 두께 35), 향로석(높이 35, 폭 33, 두께 29), 촉대석(높이 37, 폭 21, 두께 21.5), 동자석(높이 92, 폭 30.5, 두께 27), 문인석(높이 161, 폭 50, 두께 42)의 옛 석물이 진설되어 있다. 장명등은 근래에 도난당하여 새로 마련하였으며, 봉분에는 원형의 호석을 둘렀다. 상석의 좌우에 놓인 도자기 모양의 촉대석이 주목된다. 문인석은 금관조복을 입고 있으며 동자석은 양손으로 향꽂이를 쥐고 있다. 또한 봉분의 앞에 방부원수 양식의 묘표가 건립되어 있다. 비신의 앞면에 피장자의 신분을 쓰고 뒷면에 “숭정(崇禎) □ □ 년(年) 삼월(三月) 일립(日立)”이라는 연대를 기록하였으나 음기는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각 내에 귀부개석(龜趺蓋石) 양식의 신도비(총 높이 약 341)가 안치되어 있다. 귀부(높이 80, 폭 202.5, 두께 226)의 등에는 귀갑문(龜甲紋)을 짜임새 있게 잘 배치하였으며, 개석(높이 약 70, 폭 146.5, 두께 90)에는 공포(栱包)를 층지게 조각하였다. 석실산인(石室山人)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지은 비문을 이조판서 김집(金集, 1574~1656)이 비신(높이 191, 폭 90.5, 두께 30)의 앞면에만 단정하게 썼으며 홍문관부제학 여이징(呂爾徵, 1588~1656)이 전액을 올렸다. 비제(碑題)는 “조선국(朝鮮國) 증자헌대부(贈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지경연(兼知經筵) 의금부(義禁府) 춘추관(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행가선대부(行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오위도총부부총관(兼五衛都摠府副摠管) 한공(韓公) 신도비명병서(神道碑銘幷序)”이고, 전액이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한공(韓公)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 되어 있어 비석의 종류가 신도비임을 알 수 있다. 건립연대는 “숭정(崇禎) 경인(庚寅, 1650, 효종 1) 계동(季冬) 일(日)”이다.

이외에도 한효중 묘 주변에는 예조참판 한윤창, 예조참판 한필원, 금산군수 한여우, 사포별제 한극공의 묘가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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