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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원 묘

□ 소재지 : 북내면 주암리
□ 시 대 : 조선

한계원(1814~1882)은 고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우(公佑), 호는 유하(柳下)이고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를 지낸 한효윤(韓孝胤, ?~1580)의 10세손이자 도촌(陶村) 한진호(韓鎭호, 1792~1844)의 아들이다. 1835년(헌종 1) 별시문과에 급제 후 홍문관 관원으로 제수되었으나 남인(南人)의 당색으로 인해 한직만을 전전하였다. 그러나 1863년(철종 14)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발탁되어 1868년(고종 5) 이조판서에 승진하고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872년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상소를 올려 대신들을 논박하자 영의정 홍순목(洪淳穆, 1816~1884), 좌의정 강노(姜㳣, 1809~1887)와 함께 상소의 지나침을 들어 나국(拿鞫)할 것을 청하였다. 한때 개인 문제로 탄핵받아 김제와 춘천으로 유배되었으나 왕의 신임이 두터워 곧 바로 풀려났으며 1879년(고종 16)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881년 흥선대원군의 서자(庶子)인 이재선(李載先, ?~1881)을 추대하려는 모역(謀逆)사건을 위관(委官)이 되어 처리했으며 다음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올랐다.

묘는 주암리 행치고개 남쪽 구릉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22, 폭 82, 두께 38.5), 상석(높이 43, 폭 144.5, 두께 90), 고석(높이 32, 폭 36, 두께 36), 향로석(높이 60, 폭 39, 두께 55), 망주석(높이 203, 폭 45, 두께 45), 차일석(높이 15, 폭 16, 두께 16), 장명등(높이 200, 폭 67, 두께 67)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으나 석양(石羊)은 근래에 도난당하였다. 원형의 고리 장식을 단 고석과 더불어, 향로석의 뒷부분을 돌출시켜 상석을 받치고 있다. 그리고 묘역의 중앙에 놓인 다각지붕의 장명등은 사방에 화창(火窓)을 내고 몸체에는 화문(花紋)을 장식하였다. 석물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조각 수법도 우수하여 고종대 석물의 기준작으로 삼을 만하다. 봉분의 좌측에 방부개석 양식의 묘표(총 높이 약 282)가 건립되어 있다. 오석(烏石)의 비신(높이 160, 폭 59, 두께 32) 앞면에 대해(大楷)로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청주(淸州) 한공계원지묘(韓公啓源之墓) 정경부인(貞敬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 부좌(祔左)”라고 하여 피장자의 신원을 밝히고 있다. 비신의 나머지 면(面)에 채산거사(茝山居士) 연안(延安) 이헌기(李憲基)가 지은 음기를 파평(坡平) 윤경규(尹庚圭)가 썼다. 표제는 기록하지 않았으며,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오갑신(五甲申, 1884, 고종 21) 칠월(七月) 일(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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