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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영 묘

□ 소재지 : 대신면 장풍리
□ 시 대 : 조선

조한영(1608~1670)은 현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 자는 수이(守而), 호는 회곡(晦谷)이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조계상(曺繼商, 1466~1543)의 후손으로 공조참판 조문수(曺文秀, 1590~1647)의 아들이며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과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인이다. 또한 팔분체(八分體)에 정통하여 명필로 이름을 떨치던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과 『순오지(旬五志)』를 저술한 현묵자(玄默子)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은 그의 사위이다. 1627년(인조 5) 생원시에 합격하고 1637년(인조 15)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1640년 사헌부지평에 재직시 청(淸)이 명(明)을 치기 위해 군대의 파견과 원손(元孫)을 볼모로 삼기 위해 심양(瀋陽)에 보내라고 강요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1641년 김상헌(金尙憲, 1570~1652) 등과 함께 청(淸)에 압송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지만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귀국 후 헌납과 이조참의를 지내면서 남인(南人)인 윤휴(尹鑴, 1617~1680)의 등용을 적극 반대하다가 한때 면직(免職)되었다. 찬집청당상(撰集廳堂上)으로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찬에 참여한 후 호조참의와 예조참판을 거쳐 하흥군(夏興君)에 봉해졌다. 여주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묘는 오룡골마을의 뒤쪽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5, 폭 83, 두께 49), 상석(높이 39, 폭 148, 두께 91), 향로석(높이 36, 폭 30, 두께 27), 망주석(높이 179, 폭 59, 두께 59), 문인석(높이 74, 폭 30, 두께 25)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문인석의 규모가 작아서 동자석 같지만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고 양손으로 홀(笏)을 쥔 형상의 엄연한 문인석이다. 망주석은 팔각 대석(臺石)위에 주신을 세우고 연주(連珠)를 조각하였으며 봉분 앞으로 방부원수 양식의 묘표(총 높이 139)를 세웠다. 백대리석 비신(높이 112, 폭 58, 두께 16)의 앞면에는 아름다운 예서체(隸書體)로 피장자의 신원을 썼다. 나머지 삼면에 어떠한 기록도 없어 정확히 누가 쓴 것인지 모르지만 글씨체로 판단컨대 사위인 김수증(金壽增)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묘역 아래에 방부개석 양식의 신도비(총 높이 약 348)가 건립되어 있다. 방부(높이 67, 폭 166, 두께 95)의 윗면에는 복련(覆蓮)을, 사면(四面)에는 당초문(唐草紋)과 안상(眼象)을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겸오위도총부부총관(兼五衛都摠府副摠管) 하흥군(夏興君) 조공(曺公) 신도비명병서(神道碑銘幷序)”라는 제목의 비문을 지은 후 조카인 황해도관찰사 이덕성(李德成, 1655~1704)이 정성들여 글씨를 썼다. 전액은 “예조참판(禮曹參判) 하흥군(夏興君) 조공(曺公) 신도비명(神道碑銘)”이나 쓴 사람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손남(孫男) 조하언(曹夏彦, 1657~1699)과 우의정 윤증(尹拯, 1629~1714)이 지은 두 개의 추기(追記)도 역시 서자(書者)가 미상(未詳)이다. 비신(높이 241, 폭 110, 두께 27)의 앞뒤와 오른쪽에만 비문을 각자하였으며, 건립연대는 “숭정갑신후(崇禎甲申後) 오십사년(五十四年) 정축(丁丑, 1697, 숙종 23) 월(月) 일립(日立)”이다.

조한영 묘의 우측 구릉에는 둘째 아들인 담양부사(潭陽府使) 조전주(曹殿周, 1640~1696)의 묘소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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