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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우 묘

□ 소재지 : 점동면 장안리
□ 시 대 : 조선

정양우(1574~1647)는 인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군과(君過)이며 호는 석곡(石谷)이다. 충정공 정대년의 증손이자 증이조판서 정호 아들이며 형조참판 정양필의 형이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한 후 1626년(인조 4) 음서(蔭敍)로 관직에 진출하여 세마(洗馬)에 임명되었다. 이후 위솔(衛率)과 익찬(翊贊)을 지내고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를 거쳐 외직(外職)으로 나아가 홍천현감(洪川縣監)을 역임하였으며,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이르렀다. 사후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묘는 장안리 관골에서 사곡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우측 구릉에 남동향(南東向)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5, 폭 74.5, 두께 35.5), 상석(높이 23, 폭 136.7, 두께 86), 향로석(높이 40, 폭 38, 두께 30.5), 망주석(높이 168, 폭 40.5, 두께 39), 문인석(높이 163, 폭 48, 두께 37.5)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원형의 호석을 새로 설치한 봉분 앞에는 방부개석 양식의 묘갈(총 높이 170.8)이 건립되어 있다. 검게 산화된 대리석 비신(높이 143.8, 폭 62, 두께 19)의 앞면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공조좌랑(行工曹佐郞)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 정공지묘(鄭公之墓) 숙부인(淑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 부좌(祔左)”라 쓰여 있어 부부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비신의 뒷면에 각자한 묘갈문은 마모가 극심하여 육안으로의 판독이 어려운 실정이나, 좌측 하단에 “□□□원(元)□정미(丁未) 구월(九月) 일(日)”에 “자(子) 태제(泰齊, 1612~1669) 입석(立石)”이라 되어 1667년(현종 8)에 조성되었음을 판단할 수 있다. 『한국금석총목(韓國金石總目)』(1984, 동국대학교출판부)에 의하면 묘갈문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지은 것이다. 그리고 비신 상단에 새겨진 “증참의(贈參議) 정공(鄭公) 묘갈명(墓碣銘)”이라는 전액을 통해서 비석의 종류가 묘갈임을 파악할 수 있다. 방부(높이 27, 폭 95, 두께 56)에는 복련(覆蓮)을 두른 후 연주(連珠)와 당초문(唐草紋)을 장식하였다. 또한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착용한 문인석은 두터운 양손과 경직된 의습선(衣褶線)이 양식상의 특징이다. 상석은 고석(鼓石) 대신에 직사각형의 받침석(높이 27, 폭 137, 두께 42)이 떠받치고 있으며, 향로석에는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운각(雲角)과 염우(廉隅)를 마련한 망주석의 주신(柱身)에는 먹이를 물고 가는 청설모를 새겨놓았다. 한편 봉분의 우측에는 1987년에 후손들이 다시 세운 방부개석 양식의 새 묘표가 세워져 있다.

정양우 묘소의 우측 아래에는 장남(長男)인 동래부사(東萊府使) 정태제(鄭泰齊, 1612~1669)의 묘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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