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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조 묘

□ 소재지 : 북내면 내룡리
□ 시 대 : 조선

이휘조(1603~1681)는 숙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자미(子美)이며 충정공 이현영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다가 1633년(인조 11) 31세의 늦은 나이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 직후 재상의 자제를 볼모로 보내야 한다는 청(淸)의 요구에 따라 이조판서의 아들로서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가 7년 만에 귀국하였다. 1645년(인조 23) 장원서주부(掌苑署主簿)가 되고, 1664년(현종 5) 이천(利川)과 영천(永川)의 수령으로 나갔다. 이후 노인직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된 뒤 한양 용산(龍山)의 강사(江舍)에 물러나 풍류를 즐기면서 강백년(姜栢年, 1603~1681) 등과 교유하며 말년을 보냈다.

묘는 내룡리 상작골의 남서쪽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9, 폭 76, 두께 36.5), 상석(높이 22, 폭 125, 두께 82), 향로석(높이 24, 폭 36, 두께 25), 망주석(높이 153, 폭 35, 두께 35)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으며 봉분에는 정교하게 다듬은 호석을 원형으로 설치하였다. 상석에는 피장자의 신원을 각자하고 향로석엔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상석의 좌우에 서 있던 동자석 규모의 문인석은 근래에 도난당하여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묘역의 좌측에 방부원수 양식의 묘표(총 높이 163)가 세워져 있다. 비신(높이 123, 폭 56.5, 두께 15.5)의 삼면에 음기를 각자하였으나 표제와 찬서자는 기록하지 않았다.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오십구년(五十九年, 1686, 숙종 12) 사월(四月) 일립(日立)”이다.

묘역 아래에 방부개석 양식의 묘갈(총 높이 약 244)이 건립되어 있다. 이조참판 박세채가 지은 묘갈문의 갈제(碣題)는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행통정대부(行通政大夫) 파주목사(坡州牧使) 이공(李公) 묘갈명병서(墓碣銘幷序)”이고 글씨는 좌의정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썼다. 남구만은 안진경체(顔眞卿體)를 깊이 체득하여 당대 명필의 반열에 오른 인물로 그의 서체는 졸박흉용(拙樸洶湧)한 점이 특징이다. 비신(높이 160, 폭 73, 두께 26)의 상단에는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이공(李公) 묘갈명(墓碣銘)”이라고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신익상(申翼相, 1634~1697)이 전액을 올렸다. 비신의 앞뒤에만 각자하였으며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오십구년(五十九年, 1686, 숙종 12) 사월(四月) 일립(日立)”이다.

이휘조 묘소 아래에는 아들인 군자감판관 이명항의 묘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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