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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묘

□ 소재지 : 점동면 관한리
□ 시 대 : 조선

이상의(1560~1624)는 인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이원(而遠), 호는 소릉(少陵) 또는 파릉(巴陵)이며,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을 지낸 이우인(李友仁)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 승정원주서 등을 거쳐 병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宣祖)가 의주로 피난갈 때 검찰사(檢察使)로 호종하였고 1597년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에 다녀왔다. 한때 외직으로 성천부사에 나갔고 1606년(선조 39) 중앙에 다시 복귀하여 도승지와 형조판서를 지내고 1609년(광해군 1)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재질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여 그 공도(公道)를 칭찬받았다. 1611년(광해군 3) 가을 동궁고명면복주청사(東宮告命冕服奏請使)로 다시 명(明)에 다녀왔고 이듬해 광해군을 임란 때 호종한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에 책록되어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가 1616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위성공신이 혁파되자 훈봉이 삭탈되고 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사후 선조대의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글씨에 능하였고 저서로 『소릉집(少陵集)』이 전한다.

묘는 원래 관한리 윗말의 정각사(正覺寺) 뒤쪽 오압산 구릉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황해도(黃海道)로 이장하면서 그 터만 전해 오다가 1987년에 후손들이 설단(設壇)하였다. 그리고 방부이수 양식의 제단비를 세우고 그 비신의 중앙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증영의정(贈領議政) 시익헌(諡翼獻) 소릉(少陵) 여주이공상의(驪州李公尙毅)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해평윤씨지단(海平尹氏之壇)”이라고 썼다. 또한 좌우에는 최근에 제작한 망주석 1쌍과 이장하면서 땅에 묻어 두었던 옛 문인석 1쌍을 발굴하여 다시 배치하였다. 금관조복을 입은 문인석(높이 205, 폭 70, 두께 56)의 얼굴에 수염이 기품 있게 나 있고, 뒷면의 후수(後綬)와 폐슬(蔽膝)에는 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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