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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숭조 묘

□ 소재지 : 가남읍 대신리
□ 시 대 : 조선

유숭조(1452~1512)는 중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종효(宗孝)이고 호는 진일재(眞一齋)이며 전생서령(典牲署令) 유지성(柳之盛, 1422~1478)의 아들이다. 1472년(성종 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에 발탁되었다. 그리고 사간원정언·홍문관부교리·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면서 관리들의 기강 확립에 힘썼다. 성품이 강직하여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직간(直諫)하다가 미움을 사서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다시 판결사(判決事)에 등용되어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였다. 또한 성균관대사성을 오랫동안 맡으면서 뛰어난 신진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성리학 진작에 크게 공헌하였다. 당시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도 평소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장하던 유숭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한때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대사성의 자리를 그가 아니면 지킬 사람이 없다는 대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다시 재임되었으며 관직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학문이 높아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에 밝았고 천문(天文)과 역상(曆象)에도 통달하여 손수 혼천의(渾天儀)를 만들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대학삼강팔목잠(大學三綱八目箴)』,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 『진일재문집(眞一齋文集)』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묘는 대신리 삼은농장의 서쪽 구릉에 동향(東向)으로 자리 잡고 있는 백부(伯父) 유맹기 묘의 좌측 구릉에 위치한다. 묘역에는 상석(높이 7, 폭 164, 두께 88), 향로석(높이 22, 폭 27.5, 두께 24), 망주석(높이 210, 폭 55, 두께 55), 문인석(높이 176, 폭 44, 두께 38), 장명등(높이 187, 폭 76, 두께 76.5)의 옛 석물이 구비되어 있다. 최근에 호석(護石)을 새로 두른 봉분 앞에 방부원수 양식의 묘표가 세워져 있다. 비신의 앞면에 “문목공(文穆公) 진일재(眞一齋) 유선생묘(柳先生墓) 정경부인(貞敬夫人) 민씨부(閔氏祔)”라고 쓰여 있어 피장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다. 음기나 건립연대가 없어 정확한 조성 시기를 파악할 수 없지만 서체(書體)나 각법(刻法)으로 판단컨대 일제강점기 이후로 추정된다. 또 상석의 사면에는 직사각형 석재를 보완하여 원형이 훼손되었으며, 향로석 몸체에는 화문(花紋)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망주석 상단부에는 운각(雲角)과 염우(廉隅)을 조각하고, 사각형 대석(臺石)에는 복련(覆蓮)과 안상(眼象)을 장식하였다. 우측 망주석의 주신(柱身)과 상단부(上段部)는 파손되어 다시 보충한 것이다. 또한 복두공복을 착용한 문인석은 단아한 용모를 갖추고 있는데, 공복 소매가 홀(笏)을 쥔 양손을 모두 덮은 양식상의 특징이 있다. 특히 왼쪽 문인석의 가슴 부분에는 아직도 총알이 박혀 있는 탄흔이 남아 있어 주목된다. 묘역 중앙에 놓여 있는 장명등은 안정된 구도에 안상(眼象), 앙련(仰蓮), 화문(花紋), 복련(覆蓮) 등의 다양한 문양을 새겼으나 옥개석의 뒷부분이 파손되었고 화사석(火舍石)도 근래에 다시 마련한 것이다. 한편 묘역 아래에는 1983년에 건립한 방부이수 양식의 신도비가 있다. 진천군(晋川君) 강혼(姜渾, 1464~1519)이 지은 비문을 후학(後學) 김중환(金重煥)이 단정하게 썼으며, 비신의 상단에 “문목공(文穆公) 진일재(眞一齋) 유선생(柳先生) 신도비명병서(神道碑銘幷序)”라고 올린 전액은 15대손 유기수(柳麒秀)가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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