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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 묘

□ 소재지 : 북내면 장암리
□ 시 대 : 조선
□ 지정사항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8호

원호(1533~1592)는 선조대의 무신으로 본관은 원주, 자는 중영(仲英)이며 충무위부사직 원중륙의 증손이자 첨지중추부사 원송수의 아들이다. 이진자(頤眞子) 김덕수(金德秀)의 문하에서 윤두수(尹斗壽, 1533~1601), 이해수(李海壽, 1536~1599)와 더불어 학문을 닦고 무예도 연마하였다.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경원부사로 재직시 니탕개(尼湯介)의 침입을 무찔러 전공을 쌓았다. 한때 전라우도수군절도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강원도조방장(江原道助防將)으로 여주의 신륵사(神勒寺)와 구미포(龜尾浦)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그 공으로 여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금화(金化) 전투에서 왜군의 복병을 맞아 분전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묘는 장암리 아랫말에 위치한 원주원씨세장지의 맨 위에 서향(西向)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원형대로 잘 보전되어 있으며 혼유석(높이 11, 폭 94.5, 두께 38), 상석(높이 29, 폭 148, 두께 96), 향로석(높이 37.5, 폭 44, 두께 33), 문인석(높이 214, 폭 65, 두께 55)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육중한 몸집의 문인석은 머리에 복두를 쓰고 손에 홀(忽)을 꼭 쥔 채 시립(侍立)하고 있다. 상석의 앞면에는 피장자의 신원을 각자해 놓았으며, 그 앞에 사각형의 향로석(香爐石)을 설치하였다. 봉분 앞에 세워진 방부개석 양식의 묘표(총 높이 194.5)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비신(높이 128, 폭 65, 두께 18)은 백대리석을 사용하였는데, 앞면에 피장자의 신원을 쓰고 나머지 삼면에 묘표음기를 각자하였다. 그러나 찬서자는 기록하지 않았다.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팔십일년(八十一秊) 무자(戊子, 1708, 숙종 34) 시월(十月) 일립(日立)”이다.

묘역 아래에 방부개석 양식의 신도비(총 높이 약 364)가 세워져 있다. 비석 받침인 방부(높이 104, 폭 162, 두께 106)의 높이를 전체적으로 좀 더 높게 하여 장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비문은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1650~1735)가 찬(撰)하고 7세손 개성부유수 원인손이 서(書)하였으며 호조참판인 김시묵(金時默, 1722~1772)이 전액을 올렸다. 비신(높이 205, 폭 92.5, 두께 31)의 전후에 비문을 새겼으며 상태는 양호하다.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삼무자(三戊子, 1768, 영조 44) 구월(九月) 일(日)”이다.

원호 묘소 바로 아래부터 연이어 좌의정 원두표 → 대호군 원몽은 → 영릉참봉 원유증 → 원계군 원유남 → 황해도관찰사 원만석 → 원흥군 원경렴 → 영동현감 원석현 → 원춘군 원세교 → 금초 원병상의 순으로 묘가 조성되어 있다. 이 같은 세장지는 도내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조선시대 묘제사 연구의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이외에도 주변에는 첨지중추부사 원송수, 은산현감 원죽수, 부령부사(富寧府使) 원희(元熹, 1543~1592), 경상수사(慶尙水使) 원양(元亮), 봉사(奉事) 원경남(元慶男), 진사 원익흥(元益興), 돈령부도정 원명익(元命益 1675~1749), 대호군 원명설, 사과(司果) 원득신(元得臣), 참봉(參奉) 원도희(元道喜) 등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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